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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연법과 국가이성

1. 국가이성의 탈선과 대안적 사고

 

헌법국가에서 국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어떤 수단이든 사용할 수 있는가? 그것이 헌법에 위배되어도? 예를 들어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서 극우 파시즘적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괜찮은가? 이 파시즘이 헌법 질서를 무너뜨리는데도?

한편, 법의 이성이 제 구실을 못하고 무기력해서 위기가 발생하거나 현행 헌법의 제도적 장치가 미비해서 국가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역사는 초법적 정치 행위가 권력남용으로 이어지는 사례를 많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실제로 비상조치가 필요할 때도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때를 놓치고 국가가 몰락한 경우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대내외적 위기 극복을 위해서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선택하는 수단과 방법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문제는 이때 무슨 기준으로 어느 선까지 국가이성에게 법의 이성을 우회하도록 허용할 수 있는 지다. 비상조치권의 남용을 방지하는 장치를 갖추고 있는지도 동시에 문제가 될 것이다.

​법에는 실정법이면서 효력을 가진 불법이 있다.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나치의 실정법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초법적인 법도 있다. 실정법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근거로서의 법이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자연법으로서 이성적 세계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국가가 법을 자의적으로 처분할 수 없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자연법은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서 18세기 근대까지 패러다임이 변하면서 서구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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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여신 디케.png
2. 계몽과 혁명과 국가이성

1. 근대 계몽의 두 종류

 

근대의 계몽에는 두 종류가 있다. 17~18세기에 유럽을 휩쓴 초기 계몽은 사상가/철학자(philosophes)와 작가들에 의한 진보적 계몽이었다. 영국의 로크(Locke)와 흄(Hume), 프랑스의 몽테스키외(Montesquieu)와 볼테르(Voltaire), 디드로(Diderot), 달랑베르(d’Alembert) 그리고 독일의 레씽(Lessing)과 빌란드(Wieland) 등이 진보적 계몽의 선구자에 해당한다.

또 하나의 계몽은 18세기 중반부터 절대군주가 계몽사상을 통치에 활용한 것이다. 프랑스의 절대군주는 정권에 비판적인 계몽사상을 싫어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달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등 근대화가 뒤진 중부 유럽과 스웨덴 등 북유럽에서는 절대군주에 의한 보수적 계몽이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Friedrich) 2세와 오스트리아의 요셉(Joseph) 2세 그리고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Gustav) 3세를 당시의 계몽군주라고 부른다.
​계몽사상과 절대주의(Absolutism)는 이론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권력은 따져 묻는 것을 싫어한다.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진보적 계몽은 이성의 자유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즉, 따져 물을 수 있는 자유를 원했다. 따라서 진보적 계몽과 권력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진보적 관점에서 계몽군주라는 말은 자체적으로 모순되고, 왜곡된 개념이다. 그런데 어떻게 계몽군주라는 개념이 회자되고, 계몽군주의 통치철학을 국가이성으로 미화하기까지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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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 초기의 시대정신,
국가이성
중세 말과 근대 초의 전환기적 상황

 

14∼15세기에 유럽은 기근과 질병(흑사병) 및 전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그 결과 과거의 봉건적 위계질서와 공동체에 균열이 생겼다. 이것은 16세기에 시작된 근대국가 건설의 토대가 되었다. 16∼17세기는 유럽에서 전쟁이 가장 많이 발생했던 시기다. 이 기간 중 일부 정치체제는 생존해서 근대국가로 입지를 다졌으며 일부는 지도에서 사라졌다. 아래의 유럽 지도 세 개(<그림 1>과 <그림 2> 그리고 <그림 3>)에서 영토별 경계선 혹은 국경선의 변화를 비교하면 당시 유럽이 얼마나 전쟁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다. 200년 동안 평균적으로 3년 마다 새로운 전쟁이 발생했으며, 전쟁이 없던 기간은 약 10년에 불과했다.

근대 초기의 시대정신, 국가이성

 

전쟁이 유럽을 지배하면서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교황의 보편적(universal) 권력은 질서 유지에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었고, 정당성이 약화되었다. 여기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초래한 의식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그림 1>에 보이는 여러 지역의 상이한 법질서와 관습 및 전통은 (신성로마제국 내) 무정부상태와 내전 및 국가/지역 간의 전쟁을 초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개인적 유대관계에 기초한 봉건적 정치공동체 대신에 지역에 기반을 두고 정치권력의 집중과 무력/군사력의 독점 및 중앙집권화를 통해서 안정과 질서를 모색하는 영토국가(territorial state)가 대안으로 추구되었다.

유럽 1490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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