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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법과 국가이성

최종 수정일: 5월 4일

  1. 국가이성의 탈선과 대안적 사고

 

헌법국가에서 국가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어떤 수단이든 사용할 수 있는가? 그것이 헌법에 위배되어도? 예를 들어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서 극우 파시즘적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괜찮은가? 이 파시즘이 헌법 질서를 무너뜨리는데도?


한편, 법의 이성이 제 구실을 못하고 무기력해서 위기가 발생하거나 현행 헌법의 제도적 장치가 미비해서 국가를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역사는 초법적 정치 행위가 권력남용으로 이어지는 사례를 많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실제로 비상조치가 필요할 때도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때를 놓치고 국가가 몰락한 경우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대내외적 위기 극복을 위해서 국가이성의 이름으로 선택하는 수단과 방법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가 중요할 것이다. 문제는 이때 무슨 기준으로 어느 선까지 국가이성에게 법의 이성을 우회하도록 허용할 수 있는 지다. 비상조치권의 남용을 방지하는 장치를 갖추고 있는지도 동시에 문제가 될 것이다.


법에는 실정법이면서 효력을 가진 불법이 있다.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나치의 실정법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에 초법적인 법도 있다. 실정법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근거로서의 법이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자연법으로서 이성적 세계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국가가 법을 자의적으로 처분할 수 없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자연법은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서 18세기 근대까지 패러다임이 변하면서 서구를 지배했다.

 

법의 여신 디케(Dike)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정의를 상징한다. 디케가 들고 있는 저울은 공정함을, 그리고 칼은 법의 엄격함을 나타낸다.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법의 여신 디케(Dike)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정의를 상징한다. 디케가 들고 있는 저울은 공정함을, 그리고 칼은 법의 엄격함을 나타낸다.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자연법이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의 실정법을 심판하는 근거로 재조명 받았다. 시대를 뛰어 넘어 실정법의 정당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해주는 규범이자 사유형식으로서 자연법이 중요하게 생각된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법철학의 근본으로 돌아가 무너진 이성을 회복시킴으로써 불법국가의 재현을 방지하려는 미래지향적 행위였을까?


법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법을 운영하는 것도 사람이다. 법치가 망가졌다는 것은 사람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다. 잘못된 법을 개선하는 것도 사람이다. 그런데 잘못된 법을 개선한다고 했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 이 같은 질문은 자연법의 역사를 관통한다. 비상조치를 취하는 초법적 국가이성의 탈선을 방지하기 위해서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연법의 역사는 이성의 역사와 궤를 함께 한다. 법과 이성의 역사를 함께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국가이성과 법의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를 시스템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순서상으로 그 다음이다. 이에 <국가의 이성과 법의 이성>이라는 주제를 두 개로 나누어 고찰하려고 한다. 우선 자연법 정신을 국가이성에 접목함으로써 국가이성의 탈선을 막는 문제에 대하여 법철학적 관점에서 생각해 볼 것이다. 그런 다음 두 번째 글에서 법치국가의 위기 시 국가이성을 제도적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가 “서양 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플라톤의 철학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다.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가 “서양 철학의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했을 정도로 플라톤의 철학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법과 이성의 역사: 법철학 관점에서

 

고대: 초월적 진리로서의 자연법과 철학적 이성

 

고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세계와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인지할 수 있으려면 올바른 이성을 갖춰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자연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인간의 삶을 영위하고, 자연과 인간의 하나 됨을 추구했다. 이때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인지되는 초월적ㆍ객관적 규범원리를 자연법이라고 한다. 이성은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파악하는 수단이었다.


자연법은 인간이 만든 실정법과 달리 진리 혹은 불변하는 ‘선험적’ 질서(존재의 본질과 원형)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실정법은 자연법에 반(反)하면 효력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플라톤은 소수의 철학자만이 이데아의 세계(진정한 법이 머무는 곳)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대다수의 사람은 이데아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었다고 여겼다.


따라서 소수의 현인이 다수의 사람을 지배하고, 국가를 통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것이 플라톤식 철인정치다. 이것은 이성의 지배를 뜻한다. 이성적인 사람이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환자의 치료를 위해서 환자의 의사에 반(反)한 치료법을 강제할 수 있듯이, 피지배자의 의사에 반(反)한 ‘선(善)으로의 강제’도 용인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후기에 “어떤 인간도 만약 모든 인간사에 대해 무제한적인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면, 횡포와 불의에 빠지게 됨을 막을 수 없다”(『법률』 Nomoi)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률이 그 스스로 지배자가 아니게 되고 지배자의 힘에 종속된 국가에 대해서 나는 감히 멸망을 미리 고한다.”(앞의 책)고 주장했다. 사람(철인왕)의 지배에서 법의 지배로 철학이 바뀐 것이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로서 로마의 무너져가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암살당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로서 로마의 무너져가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암살당했다.

스토아학파에 속하는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Cicero)도 인간의 삶에서 최고 목표는 자연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참된 법은 ‘자연’과 조화한 정당한 도리이다. 그것은 보편타당성이 있는 것이며, 불변적이고 항상적”(『국가론』 De republica)이라고 말했다. 또한 “법은 자연에 뿌리박고 있는 최고의 이성이며, 그것은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를 명령하고 그 반대를 금지하는 것”(『법률론』 de legibus)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이 고대에서 자연법과 이성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중세: 신의 의지가 반영된 자연법과 신학적 이성

 

중세 시기에도 인간이 만든 실정법의 정당성을 판단하게 해주는 규범으로서 자연법이 기능했다. 그러나 중세와 고대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신의 의지가 자연 질서를 초월해서 나타난다고 본 점이다. 신의 의지가 기적의 형태로 자연 질서에 역행해서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에서 초자연적 세계는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오직 신의 섭리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중세 때는 신의 섭리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법도 신의 섭리가 반영된 ‘영구법’(신의 법, lex aeterna)이 우선하고, 그 다음에 영구법이 인간의 의식에 모사되어 나타난 자연법(lex naturalis), 그리고 그 다음에 인정법/속세법(인간이 만든 법, lex temporalis)의 순서로 법의 위상이 구분되었다.(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신국론』 De Civitate Dei).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가 없는 국가는 절도단체인 것처럼 부당한 법은 법이 아니”라고 했다.(앞의 책) 그런데 여기서 법이 부당한지의 여부를 판단한 근거는 실정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상위법, 즉 영구법과 자연법이었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의 신학은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최고의 권위로 인정받는다.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의 신학은 모든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최고의 권위로 인정받는다.

법의 체계를 세 단계로 나눈 것은 이미 고대의 스토아학파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차이점을 들자면 스토아학파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외적인 힘(세계이성)과 운명(fatum)의 자리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신의 이성과 의지로 대체된 것이다. 그리고 스토아학파에게서는 영구법과 자연법의 경계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와 달리 불분명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자연법 이론은 고대 그리스와 중세의 자연법 이론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고대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정의는 의롭기 때문에 신의 마음에 드는 것이지, 신의 마음에 들기 때문에 의로운 것은 아니다”(『에우튀프론』, Eutyphron)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중세 때 “만물은 신이 의욕했기 때문에 선한 것이지, 선하기 때문에 신이 의욕한 것이 아니다”로 바뀌었다.(요하네스 둔스 스코투스<Johannes Duns Scotus>) 문제는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제대로 신의 섭리를 인지할 수 있는 가였다.


교회는 기독교의 절대 진리에서 벗어난 이성에 대해서 배타적이었고, 이런 이성을 억압했다. 중세가 아닌 17세기 초에 갈릴레이 갈릴레오(Galileo Galilei)가 교회의 압력으로 지동설을 철회한 사례는 신학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했던 중세 때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중세 때 법의 지배는 이성의 지배를 의미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고대에는 중세처럼 이성이 억압받지 않았다. 중세 말기에 인간 중심의 문예부흥 운동으로 나타났던 르네상스(Renaissance)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과 사상 및 예술의 부활/재생을 의미한 것이 이와 무관치 않다.

 

근대: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자연법과 세속적 이성

 

근대에 이르러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에 과연 질서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에 따른 정의와 법이 있는 것인지를 묻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서 토마스 홉스는 선구자였다.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생각했다. 인간이 따라야 할 질서가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극복되어야 할 혐오스러운 상태로 생각한 것이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서구 근대 정치철학의 토대를 마려한 책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저자로 유명하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서구 근대 정치철학의 토대를 마려한 책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저자로 유명하다.

홉스는 고대와 중세의 자연법이 이기심과 경쟁심 그리고 복수심 등 부정적인 정념으로 채워진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연의 질서를 상정한 자연법은 홉스에게 더 이상 실정법의 정당성과 구속력의 근거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홉스는 인간 외부에 주어진 자연 질서로부터 사회 질서를 유추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 계약에 의해서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나가려고 했다. 인간의 이성으로 만들어진 룰(Rule)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계약을 통해서 통치자(제3자)에게 복종함으로써 평화를 누리고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사회계약론이 등장했다. 이것은 인간이 계약으로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거나 포기함으로써 더 큰 이익, 즉 평화와 ‘생명의 보장’이 돌아올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으로 자연 상태를 극복하게 하는 이성법(이성에 의해서 발견된 계율 또는 일반규칙)이 만들어졌다.


홉스는 이러한 이성법을 자연법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평화가 없는 자연 상태에서 평화를 추구하도록 인간에게 명령하는 것이 자연법의 첫 번째 원칙이라고 말했다.(『리바이어던』) 여기서 이성이란 이익과 손해 등의 득실을 계산하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의미하지 않았다. 고대와 중세에 초월적 진리를 파악하는 수단이었던 이성이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바뀌면서 세속화된 것이다.


홉스의 이론에서는 과거에 인간 행위의 규범적 근거가 되었던 자연 대신에, 인간이 계약 혹은 협정을 통해서 만든 국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규범의 원천이 되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보호가 국가의 존재 이유가 된 것이다. 법도 마찬가지였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보호가 법의 역할이 되었다.


이러한 사고는 고대와 중세처럼 인간에게 선을 권유해서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계약을 위반했을 때, 이익보다 더 큰 처벌을 받게 된다는 공포와 이에 따른 이성적/합리적 판단이 국가를 건설하고 법에 복종하는 토대가 된 것이다. 홉스는 법이 주권자/통치자의 의지로 제정되고, 그래서 주권자는 법률에 구속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언제나 법률을 변경할 수 있으며 무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리바이어던』) 이렇게 되면서 자연법의 패러다임은 바뀌고, 세속화되었다.

 

3. 이성의 분화와 분열

 

근대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이 본성에 의해 규제되는 것이지, 성서의 계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하면서 이성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올바른 법의 내용도 권위와 전통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인 이성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자연을 닮으면서 자연과 하나가 되려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연을 극복하고, 지배하려고 했다. 여기에는 자연과학의 발달이 미친 영향이 컸다. 그러면서 인간은 탐욕스럽게 되었다. 국가도 탐욕스럽게 되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칸트의 철학으로 철학 연구가 칸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칸트가 철학의 틀을 바꾸었다는 평가가 있다. 『순수이성 비판』과 『실천이성 비판』 그리고 『판단력 비판』으로 유명하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칸트의 철학으로 철학 연구가 칸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칸트가 철학의 틀을 바꾸었다는 평가가 있다. 『순수이성 비판』과 『실천이성 비판』 그리고 『판단력 비판』으로 유명하다.

근대에는 얼마나 이익을 확보하느냐에 초점을 맞춘 합리성이 모든 행위의 평가 기준이 되었다. 이성은 정치적 이성과 법의 이성, 철학적 이성, 돈/자본의 이성 등으로 분화되었다. 정치적 이성은 힘과 권력이 지배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에 상응하는 합리적 전략과 정책으로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권력의 법칙을 도덕과 윤리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볼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이성은 국가의 이성과 권력의 이성 그리고 정당의 이성 등으로 구성된다. 통치자와 정당 혹은 국민 등 누가 행위의 주체가 되느냐에 따라 정치적 이성의 종류가 구분되는 것이다. 국가의 이성은 국가의 생존과 작동원리에 대한 통찰력이다. 권력의 이성은 권력의 유지를 목표로 한다. 정당이 형성되고 발전함에 따라 정당은 국가와 국민 전체보다 지지층의 이익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이를 정당의 이성이라 한다. 국민의 정치적 이성은 선거 때 유권자의 표로 표출된다.


법의 이성이란 사전에 만든 법/규범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처신할 것을 요구한다. 심지어 법을 만든 사람조차 그 법을 준수해야 하고, 인위적인 예외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법이란 보편적 이성과 정의의 결정체를 의미한다. 변덕스럽지 않은, 비인격적 의지의 결정체로서 감정을 배제하고 합리성을 대변하기도 한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한다면 거부감이 들지만, 비인격적 합리성의 결정체인 법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하면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점도 있다.


그러나 법은 경직되고, 시대상황이 변함에 따라 현실에 부적합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법의 지배보다 사람의 지배가 나은 점이 있다. 문제는 이성의 힘으로 통치할 수 있는 통치자(철인왕)를 현실에서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은 드물다. 또한 보통 사람들은 법에 의한 강요 없이 사회를 유지하기 어렵다. 권력자와 보통 사람 모두 변덕스럽고, 시시각각 변하는 욕망에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사람의 지배 대신에 차선책으로 법의 지배를 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이 이익 추구의 수단으로 되면서 철학적 이성도 영향을 받았다.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한 산업혁명 이후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등 여러 이데올로기가 난립했다. 그래서 19세기를 이데올로기 시대라고 부른다. 철학적 이성이 분열하면서 가치관과 이념(이데올로기)의 대립 및 충돌로 사회는 혼란스러워졌다. 19세기를 혁명의 시대라 부르기도 하는 이유다. 칸트의 업적은 밖으로 향하던 이성의 시선을 내부로 돌린 것이다. 칸트와 함께 자기 성찰적 기능이 철학적 이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8세기 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만든 증기기관. 이러한 기술 발전은 당시의 산업혁명을 촉진했다.
18세기 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만든 증기기관. 이러한 기술 발전은 당시의 산업혁명을 촉진했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돈은 많은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들었다. 자유인이 돈 앞에서 기꺼이 노예가 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돈은 권력이 되었다. 자본도 권력이 되었다. 이렇게 권력이 된 돈과 자본은 자기증식을 추구한다. 소유의 본질/속성은 더욱 더 많이 소유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돈과 자본의 이성이다.


이성은 욕망을 지배할 수도 있고, 욕망에 지배당할 수도 있다. 권력의 이성과 돈/자본의 이성은 탐욕스럽다. 탐욕은 만족할 줄 모른다. 종종 합리성과 충돌한다. 이런 점에서 권력의 이성과 돈/자본의 이성이라는 개념 자체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성이 세속화되면서 이성의 부정적인 기능, 즉 이익을 추구하는 도구적 기능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현실을 무시할 순 없다. 그래서 모순을 내포한 개념이지만, 필자는 권력의 이성과 돈/자본의 이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필자의 <국가이성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이성은 계속해서 중심 개념으로 등장할 것이다. 2차 정리 때 이성 개념을 보완하기로 하고, 이번 1차 정리에서는 이 정도로 멈춘다.

 

4. 자연법 정신과 국가이성

 

이성이 분화되면서 다양한 이성은 독자성을 띠고, 나름대로 운동법칙을 갖게 되었다. 상호 간에 영향을 미치면서 모순 속에 충돌하고, 대립하기도 한다. 하나의 이성(권력의 이성)이 다른 이성(철학적 이성과 법의 이성)을 지배하기도 한다. 이때 국가이성이 균형을 잡고, 원심력으로 벌어지는 이성 간의 간격을 메워야 한다. 이것이 국가이성의 역할이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는 병이 들거나 위기에 처하게 된다. 통합을 이뤄내지 못하면 국가는 결국 해체될 수밖에 없다.


법의 이성이 제 구실을 못할 때는, 우선적으로 그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법을 운영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지,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만약 시스템이 오작동을 한다면 사람이 바로 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무리수를 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상조치 등 초법적인 조치는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뉘른베르그 재판소에서 나치 전범자들을 재판하던 모습. 당시에 「법률은 법률이다」(Gesetz ist Gesetz)라는 법실증주의적 사고가 나치의 「법률의 모습을 한 불법」에 복종하도록 만들었다고 성찰하며, 자연법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뉘른베르그 재판소에서 나치 전범자들을 재판하던 모습. 당시에 「법률은 법률이다」(Gesetz ist Gesetz)라는 법실증주의적 사고가 나치의 「법률의 모습을 한 불법」에 복종하도록 만들었다고 성찰하며, 자연법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역사적으로 권력이 (실정)법의 이름으로 독재 정치를 하거나, 초법적 혹은 비법적인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이 정당한 것인지를 묻는 근거가 된 것이 자연법이었다. 어떤 외부로부터의 강요나 관습의 힘에도 불구하고, 통치자의 정치 행위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 묻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이것이 고전적 자연법이 가진 의미였다. 이것은 권력자를 포함한 인간 내부의 양심에 묻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것이 없었다면 인간의 몸과 마음은 우월한 권력의 힘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국가이성을 자연법의 정신으로 다시 고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법의 역사 전체를 보면 이성이 세속적 이익 이상의 것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초월적인 것, 즉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간이 어떻다고 판단할 때, 그것에는 이미 자의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된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인간이 따라야 할 규범을 도출할 때, 이미 자의적으로 옳고, 그르다고 판단한 것으로부터 다시 옳고, 그르다는 규범을 도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인간이 각각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자연의 본성 혹은 자연의 질서를 설정하고, 여기서 다시 자연에 합당한 현실의 규범과 가치를 도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는 순환논법을 벗어나기 힘들다.(한스 벨첼<Hans Welzel>, 『자연법과 실질적 정의』)


그렇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전부로 생각하고, 실정법 만능주의로 가서는 곤란하다. 눈에 보이는 세계에 발을 딛고 서서 합리적 규범을 도출하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앞에서 겸허하게 자신과 현실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대의 인류는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때문에 자연법의 의미도 모르고 산다. 고전적 자연법의 핵심 중 하나는 법이 권력이 명하는 바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자연법의 정신을 살리면서 현대의 자연법이 시대상황에 맞게 새로운 길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세속화된 이성의 자기 비판적/성찰적 기능을 활성화해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법철학의 관점에서 국가이성과 법의 이성 간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국가이성과 법의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를 시스템/제도 차원에서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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