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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의 개념과 비판의 역사적 기원

최종 수정일: 9월 30일

1. 문제 제기

2. 이데올로기 개념의 역사적 기원

3. 이데올로기 비판의 역사적 기원

   가. 칼 맑스(Karl Marx)의 이데올로기 비판

   나.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의 이데올로기 비판

   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이데올로기 비판

4. 학문과 이데올로기

5. 이데올로기 갈등의 극복을 위한 첫 번째 제언

     

     

1. 문제 제기

     

중세까지만 해도 우주/자연을 지배하는 힘과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힘은 둘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근대 이후로 이 초월적 힘은 두 종류의 형태로 구분되어 인식되고 있다. 하나는 태초부터 존재해 왔던 신(神) 혹은 우주법계(法界)의 질서다.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는 사람은 현대에도 신 혹은 우주 법계의 초월적 힘과 질서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세속화된 초월적 힘 혹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다. 후자는 인간 행위와 관계의 결과물이 인간의 의지에서 벗어나 외적인 힘으로 작용하며 인간을 지배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근대 이후 인간은 자연과학을 토대로 자연에 대한 의존을 줄이면서 자연의 주인이 되려 했다. 그런데 사회과학을 토대로 인간이 사회/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에 종속된 현상은 줄이지 못하고, 사회의 주인이 되지도 못했다. 정치학에서는 인간 사회의 ‘자연 상태’를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종식을 목표로 사회계약론을 만들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사회계약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개되지 않았다. 비록 사회계약론이 근/현대의 정치와 국가의 조직 및 기능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왔지만 말이다.

  이 사회계약론을 발전시킨 정치 이론도 사회/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 앞에서는 무기력하다. 특히 무한경쟁의 논리 속에서 인간이 자기 파괴적인 길로 가고 있는데 이러한 흐름을 전혀 바꾸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많은 정치인과 정치학자들은 이러한 흐름에 편승해서 이데올로기를 만들며 권력 추구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좌ㆍ우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상징하는 그림. Logan Chipkin의 논문 “In Defense of Ideology”에 수록된 삽화.(Areo Magazine) https://chipkin-logan.medium.com/in-defense-of-ideology-d6c34f20cf48
좌ㆍ우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상징하는 그림. Logan Chipkin의 논문 “In Defense of Ideology”에 수록된 삽화.(Areo Magazine) https://chipkin-logan.medium.com/in-defense-of-ideology-d6c34f20cf48

근대 초기에는 종교 간의 갈등이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데올로기가 현대판 종교가 되어 사회/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함께 세계를 유형ㆍ무형의 전쟁터로 만들고 있다. 과거에 종교를 믿던 많은 사람들은 현대에 이념/이데올로기를 믿는 사람들로 대체되었다. 때론 전통적 종교와 현대판 종교인 이데올로기가 결합하여 극단적인 정치세력을 출현시키기도 한다.


근대에 사회과학이 출범하면서 사회/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에 맞서고, 인간의 자기파괴적 속성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19세기에 이데올로기 연구의 선구자인 칼 맑스(Karl Marx)와 오귀스트 콩트 (Auguste Comte)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모두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를 비판했던 이들의 이론 모두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될 뿐이었다. 맑스의 이론은 20세기 초 소련에서 맑스-레닌주의(Marxismus-Leninismus)라는 극단적 좌익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고, 니체의 이론은 독일에서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를 내세운 나치 파시스트들의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다.

  19세기에 시작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을 모르고 탈현대적(postmodern) 과도기인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데올로기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정말 없는 것일까?

     

2. 이데올로기 개념의 역사적 기원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개념의 역사는 다르다.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는 고대와 중세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근대의 계몽주의 시대였다.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1796년 앙트완 데스튜트 드 트라시(Antoine Louis Claude Destutt de Tracy: 1754~1836)에 의해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드 트라시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전통 속에서 관념(Idee, Idea)의 기원을 연구하며 관념의 탈신비화를 추구했다. 당시에 자연과학이 자연을 탈신비화하는 것처럼 “관념의 학”(ideo-logy)을 통해서 사회를 탈신비화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 같은 학문을 이데올로기, 즉 이념 혹은 관념의 학문(the science of ideas)으로 표현하고, 중립적이면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했다.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앙투안 데스튜트 드 트라시(1754~1836)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앙투안 데스튜트 드 트라시(1754~1836)

드 트라시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에 트라시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이데올로그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어 프랑스의 정치를 과거의 방식으로 되돌리자 자유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이었던 이데올로그들이 나폴레옹의 정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이데올로그를 현실을 모르고 추상적인 문제에만 천착하는 이론가라고 비난했다.


  이렇게 되어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그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폴레옹 이후 맑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이데올로기를 ‘잘못된 의식’ 혹은 ‘허위의식’이라고 비판하면서, 부정적 의미를 가진 이데올로기 개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20세기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론은 앞에서 언급한 맑스와 콩트 그리고 니체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론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우선 맑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804년에 이데올로기를 ‘관념의 과학’으로 설명한 드 트라시의 저서
804년에 이데올로기를 ‘관념의 과학’으로 설명한 드 트라시의 저서

3. 이데올로기 비판의 역사적 기원

     

가. 칼 맑스(Karl Marx)의 이데올로기 비판

     

맑스(1818~1883)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분석한 대부분의 글은 그의 초기 저작인 『독일 이데올로기』(Deutsche Ideologie, 1845/1846)를 언급하고, 주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필자는 맑스의 초기 저작인 『독일 이데올로기』보다 훨씬 나중에 저술된 대표작 『자본론』(Das Kapital 1권, 1867; 3권, 1894)을 토대로 그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언급하고자 한다.


맑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에는 두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첫째,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해도 전자와 후자 모두 이 사실을 모른다고 했다. 생산과정에서 잉여노동의 착취가 발생하고, 이렇게 해서 생긴 잉여가치(Mehrwert)가 자본가의 이익(Profit)으로 되어도 이러한 내용을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맑스는 『자본론』 3권에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법에 걸려 전도되고 거꾸로 선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표현했다.


맑스에 따르면 이런 허위의식 또는 전도된 의식이 바로 이데올로기인데, 이것은 누구의 잘못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무능력 혹은 누군가의 조작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에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이런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이것이 자본주의를 지탱하게 해주는 정신적 토대가 된다는 것이 맑스의 주장이다. 그리고 체제 유지의 정신적 토대가 되는 이데올로기의 특성을 밝혀내려 한 것이 맑스가 『자본론』에서 시도한 것 중 하나다. 여기서 토대는 하부구조(Basis)와 상부구조(Überbau)로 구별되는 차원의 토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좌파 이론의 시조인 칼 맑스(1818~1883). 그가 추구한 공산주의 사회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사라진 ‘자유의 왕국’(Reich der Freiheit)이었으나, 그를 추종하던 후계자들이 20세기에 만든 사회주의국가는 자유가 상실된 ‘억압의 왕국’이었다.
현대 좌파 이론의 시조인 칼 맑스(1818~1883). 그가 추구한 공산주의 사회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가 사라진 ‘자유의 왕국’(Reich der Freiheit)이었으나, 그를 추종하던 후계자들이 20세기에 만든 사회주의국가는 자유가 상실된 ‘억압의 왕국’이었다.

둘째, 맑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법칙(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을 분석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 극대화하면 구조적 위기 속에서 이데올로기 시스템이 흔들리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전도된 의식에서 벗어난 노동자들이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 즉 착취 없는 사회를 만들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같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자신을 무너뜨리는 존재, 즉 무산자계급(Proletariat)을 만들고 사회주의로 넘어가면서 부정의 부정(Negation der Negation)이라는 변증법이 관철되는 것을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법칙이라 말하기도 했다. 맑스는 무산자계급의 각성이 자본의 축적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별도의 계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각성된 인텔리들이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을 주입시켜야 한다고 했던 레닌의 주장과 결이 다른 것이다.


맑스의 첫 번째 주장과 두 번째 주장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한편으로는 허위의식, 즉 이데올로기를 만들면서 시스템을 유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파괴적인 운동법칙에 따라 결국 체제를 유지했던 이데올로기 시스템을 무너뜨리며 자신도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실제 역사를 보면 맑스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발전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맑스가 말했던 것처럼 이데올로기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혁명을 초래할 계급의식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혁명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못한 러시아와 중국에서 각각 20세기 초와 20세기 중반에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맑스가 자기 이론에 존재하는 모순을 몰랐을까? 아니면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신념이 너무 강해서 자신도 모르게 이론적 비약을 했던 것일까? 맑스의 혁명 이론을 소개한 저서들을 보면 대부분 맑스의 이론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인 두 번째 주장을 소개한다. 이 혁명 이론은 맑스-레닌주의자들에 의해서 도그마로 변질되어 역사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기도 했다.


칼 맑스의 『자본론』(Das Kapital) 1-3권. 1867년에 자본론 1권이 발행된 이후 19세기와 20세기에 사상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저서 중 하나로 평가된다.
칼 맑스의 『자본론』(Das Kapital) 1-3권. 1867년에 자본론 1권이 발행된 이후 19세기와 20세기에 사상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저서 중 하나로 평가된다.

『자본론』에서 맑스가 사용한 학문적 방법론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엄격한 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본론』을 깊이 들여다보면 맑스가 논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신념과 달리 자본주의 체제의 내구성을 표현하는 부분들이 발견된다. 특히 형태분석(Formanalyse)과 관련된 부분 중에서도 임금형태(Lohnform)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앞에서 언급한 맑스의 첫 번째 주장도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맑스의 논리로 맑스를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서 잠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형태분석이 무엇인지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형태분석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관계나 인간 행위의 결과물이 왜 임의적(任意的)이 아닌, 특정한 형태를 띠는가 하는 것과 인간은 왜 그들의 행동양식에 있어서 일정한 ‘틀’ 혹은 ‘形態’속에서 행동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생산물이 타인에게 판매하기 위해서 만드는 상품(Ware)의 형태를 띠는 현상과 인간의 노동력 역시 상품의 형태를 띠는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 혹은 시민국가(Bürgerlicher Staat)가 아무 형태나 띠지 않고 굳이 법치국가의 형태를 띠는 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맑스의 모든 저술이 공개되고 맑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맑스를 재조명하면서 학자로서의 맑스와 혁명가로서의 맑스를 구분하는 시각이 맑스 연구자들 사이에 나타났다. 또한 맑스를 맑스주의자(맑스-레닌주의자를 포함)로부터 구분하고, 맑스의 이론이 도그마에 빠진 맑스주의와 어떻게 다른지를 밝히는 시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칸트와 헤겔을 있는 그대로 연구할 수 있듯이 맑스도 역사 속의 한 인물로 연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존재하면 이데올로기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선 강력한 반공주의의 여파로 이런 학문적ㆍ사회적 분위기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 2005년에 영국의 영국의 BBC 라디오 방송이 청취자 3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질문은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압도적 1위를 차지한 철학자는 약 28%의 선택을 받은 칼 맑스였다.(BBC Press Office, “Marx wins In Our Time’s Greatest Philosopher vote,” 2005년 7월 13일)


BBC Radio 4 ‘In Our Time’이 2005년 6월 6일부터 7월 7일까지 실시한 청취자 투표에서 맑스가 ‘역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선정되었다. https://www.bbc.co.uk/pressoffice/pressreleases/stories/2005/07_july/13/radio4.shtml
BBC Radio 4 ‘In Our Time’이 2005년 6월 6일부터 7월 7일까지 실시한 청취자 투표에서 맑스가 ‘역대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선정되었다. https://www.bbc.co.uk/pressoffice/pressreleases/stories/2005/07_july/13/radio4.shtml

만약 똑같은 질문으로 한국에서 설문조사를 실시한다면, 맑스는 대체 몇 %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아마 설문조사 대상으로 선정되지도 못할 것이다. 한국에선 이데올로기 장벽이 높다 보니 이데올로기의 근원을 찾아서 갈등을 해결하는 노력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좌ㆍ우 대립이 극단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나.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의 이데올로기 비판

     

맑스가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했던 반면에 콩트(1798-1857)는 반(反)혁명적이었다. 콩트가 혁명 이후의 상황을 지적ㆍ도덕적 무질서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 질서가 혁명 후 과격한 비판정신으로 해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콩트는 자연과학적 사고가 자연을 지배하도록 도와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과학이 사회를 조직하는 문제에서 학문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야 정치 질서와 사회 발전의 결합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오귀스트 콩트는 19세기 유럽의 사상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실증주의(Positivism)와 사회학(Sociology)을 창시했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오귀스트 콩트는 19세기 유럽의 사상적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실증주의(Positivism)와 사회학(Sociology)을 창시했다.

이에 콩트는 자연과학적 사고 방법을 사회과학에 도입하는 실증주의를 제시했다. 이것은 실험을 통해서 법칙을 발견하고, 전망하며 개입하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사회과학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증주의와 함께 사회학을 창시했다. 사회학의 목표는 반(反)혁명적 안정을 추구하고,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과정(process)과 구조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표를 위해서 콩트는 사회학자들이 근/현대의 산업사회에서 실질적 힘을 가진 산업자본가 및 금융인들과 연대하고 과거의 사회에서 성직자와 철학자들이 했던 역할을 새로운 사회에서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콩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 정신의 역사 발전은 세 단계에 걸쳐서 나타난다. 첫 단계는 자연과 인간 및 사회를 초월적 원칙으로 설명했던 단계, 즉 신학이 지배했던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중세 이후 형이상학이 발전하면서 신학적 사고를 대체했던 단계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콩트가 창시한 실증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단계다. 이 세 번째 단계에서는 실증주의에 따라 “예측하기 위해서 알아내고, 대상에 개입하고 조절하기 위해서 예측한다(savoir pour prėvoir, prėvoir pour regler)”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콩트에게 합리성에 관한 유일한 기준은 과학이었다. 콩트는 신학이나 형이상학에서 주장되는 것들이 조사라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지식으로 간주하기를 거절했다. 그리고 콩트는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의식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폭력을 통해서 사회 현상을 개선하도록 유도한다고 보았다. 즉, 이데올로기가 사회 발전과 질서를 결합시키는 대신에 정치적 무질서를 초래한다고 본 것이다. 반면에 실증주의를 통하면 사회의 개선과 발전이 오직 점진적 진화(Evolution)로 가능하게 된다는 점을 인식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자유주의적 시민혁명이나 – 콩트는 18세기 말의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 사회주의 혁명을 예방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다.


콩트의 저서, 『실증(주의) 철학』 제3권. 최초 발행일 1830년
콩트의 저서, 『실증(주의) 철학』 제3권. 최초 발행일 1830년

실증주의를 통해서 사회 법칙 혹은 사회운동의 자연법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또한 선입견에서 벗어난 실증주의를 통해서 정치적 사고를 학문적으로 하는(Verwissenschaftlichung des politischen Denkens) 것이 가능하게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한 사회학으로 정치적 사고와 행위를 결정하는 표준 규범을 만들고자 했다. 이 규범은 사회운동의 ‘자연법칙’을 포함하는 것인데, 이러한 사회의 자연법칙을 인식함으로써 정치적 견해의 무질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회 진보의 객관적 법칙이 자연법칙처럼 운행될 수 있도록 하기만 하면 사회의 진화와 발전은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콩트는 19세기 중엽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이데올로기 논쟁을 벌이는 와중에 실증주의를 통해서 정치 이데올로기들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콩트는 자신이 창시한 실증주의가 사회의 발전과 질서를 위한다는 명분 하에 - 다른 이론을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되면서 - 다양한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 즉 이데올로기로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이데올로기 비판

     

니체는 반(反)시대적 사상가였다. 동시대의 도덕에 저항했으며, 기존의 서구 문명을 총체적으로 비판했다. 니체가 비판한 대상은 특정 학문 분야가 아니다. 기독교는 물론 유물론(Materialismus)과 경험주의(Sensualismus) 그리고 관념론(Idealismus) 등 모든 학문 분야가 니체의 비판 대상이었다. 18세기의 계몽주의도 전통적인 철학과 도덕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니체는 계몽주의에서 중시한 이성과 이성에 기초한 철학 및 도덕 역시 기만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점에서 니체의 철학은 도발적이고 파괴적이었다. 이런 니체 철학의 특성은 오늘날 포스트모던 철학(postmodernism)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기존의 서구 문명을 총체적으로 비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기존의 서구 문명을 총체적으로 비판했다.

니체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진리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을 뒤집어 보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니체는 이성이 인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를 실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진리라고 주장되는 것의 이면에는 언제나 권력을 향한 의지가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존재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고 답했다.


니체는 사람들이 진리 그 자체를 원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익을 바랄 뿐이라고도 주장했다. 니체가 볼 때 이데올로기가 진리의 외양을 띠는 것은 그것이 단지 원하는 효과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만큼이다. 진리처럼 보일수록 이익을 추구하고 이해관계를 관철하는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비판에서는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과 내용이 권력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학자/철학자 그리고 성직자들을 권력에 충성하는 사람이자 권력 합리화의 수단인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니체는 종교는 물론 역사학과 철학 등 모든 분야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비판했다. 그러나 각 분야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열거하면 그렇지 않아도 많은 본 원고의 분량이 너무 많아지게 된다. 이에 앞에서 언급된 실증주의와 관련해서 니체가 비판한 부분만 하나의 사례로 들고자 한다.


사실적인 것 혹은 팩트로 구성된 현실과 객관성은 실증주의의 핵심 개념이다. 그런데 니체에 따르면 실증주의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객관성(Objektivität)이란 것이 사실은 학자가 머릿속에서 이미 받아들이고 내재화한 도덕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표현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순진한 역사학자들이 과거의 생각과 행동을 기준으로 현재의 현실과 생각을 재단하는 것을 객관적이라 판단하고, 유행하는 대중적 사고를 규범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역사 서술을 주관적이라 평가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진리를 찾을 의지와 능력을 보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마치 진리를 추구하는 종사자(Diener der Wahrheit)인 것처럼 환영하는 사회 분위기를 용서해 줘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진리도 하나가 아니라, 그만그만한 여러 진리가 존재하게 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반시대적 고찰』 Unzeitgemäße Betrachtungen)


그뿐만 아니라 니체는 학자들이 말하는 팩트/사실이라는 개념이 현실(Wirklichkeit)의 역사적 측면을 보이지 않게 한다고 비판한다. 전체가 아닌 부분을 강조하는 가운데 – 잘못 - 추정된 사건을 현실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서광』 Morgenröte) 그리고 학자들이 팩트를 쌓아놓고, 미시 논리를 전개하면서 사전에 갖고 있던 생각과 자신이 도출한 연구 결과 사이에 마치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처럼 기만한다는 비판도 한다. 그러면서 지배권력에 종속된 연구자의 선입견을 투사해서 얻은 팩트는 객관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요소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니체의 이런 비판에 따르면 실증주의도 이데올로기라는 지적을 면할 수 없게 된다.


한국에서 번역된 니체 전집 총 21권
한국에서 번역된 니체 전집 총 21권

니체는 이데올로기가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것의 내용보다 기능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데올로기의 내용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고 해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비판을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이데올로기가 이익을 가져다줄수록 더욱 그렇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서 그 내용이 더 이상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게 된다.


니체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기능할 수 있었던 현실이 변해야 사라질 수 있다. 단지 비판만으로는 이데올로기를 소멸시키기 어렵다.(『권력에의 의지』 Wille zur Macht) 실제로 이데올로기를 유지시키는 구조가 강력해서 변화시킬 수 없다면 오히려 새로 알게 된 진실로 고통만 생길 수도 있다. 새로운 것을 대안으로 찾고, 제시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이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런 한계 때문에 니체의 비판은 허무함을 남긴다.


그렇다고 비판하지 않으면 이데올로기적 환상/허상의 노예가 된다. 니체는 이런 딜레마 속에서 “아는 자의 지배(Herrschaft der Wissenden)”, 즉 모든 학자와 지식인에게 가야 할 길과 목표를 제시하고 명령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자’(Freigeist)의 지배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 목표는 이상적인 천재의 공화국(Genialenrepublik)이다. 니체에 따르면 입법자이자 동시에 철학자인 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자’를 통해서 이론과 실천이 결합되고 제도화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새로운 조작과 왜곡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과거의 기생적인 지배구조가 해체된 후 위대하고 고독한 영웅에 충성하기 위해서 태어난다는 대다수 국민이 이 영웅에 복종하는 새로운 기생적 권력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해서』 Über die Zukunft unserer BildungsAnstalten) 이런 구조에서는 대중을 조작할 수 있는 소수만 지식을 소유한다. 그리고 인류 전체의 발전을 책임지는 철학자 영웅은 대중을 지배하기 위해서 종교로 대중을 교육한다.(『선악의 피안』 Jenseits von Gut und Böse) 이것이 니체식 이데올로기 비판의 비극적 결말이다. 니체의 이런 주장은 독일의 나치들에 의해서 적극 활용되었다.

니체와 히틀러를 비교한 그림. 스티븐 힉스(Stephen R.C. Hicks)의 오디오책 Nitzsche and the Nazis 표지에 나온다.
니체와 히틀러를 비교한 그림. 스티븐 힉스(Stephen R.C. Hicks)의 오디오책 Nitzsche and the Nazis 표지에 나온다.

     

4. 학문과 이데올로기

     

지동설이 나오기 전까지 천동설은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당연시되었던 진리였다. 누가 무슨 목적을 갖고 천동설을 주장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천동설을 부정할 수 있는 지동설이 학문적으로 인정받은 후에도 교회 당국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천동설을 고집했던 것은 이데올로기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목적의식을 갖고 진실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학문적 외피를 걸칠 때가 많다. 그래서 어떤 이론이 이데올로기인지, 혹은 학문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힘들 때가 있다. 그럼에도 이 둘을 구분하면 이데올로기는 흑백 논리로 포장된 경우가 많고, 선동적이다. 반면에 학문은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 객관적 인과관계로 얽힌 사회구조와 법칙 등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학문이란 그것을 수단으로 인간이 객관적 세계를 분석 및 설명하고, 관리/지배할 수 있는 이론 체계를 말한다. 물론 학문은 틀릴 수 있다. 현실을 잘못 판단하는 것은 학자의 실수다. 틀린다고 해서 학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을 알고도 왜곡되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이데올로기와 학문 모두 가치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는 가치의 이면에는 권력을 추구하고 획득하려는 의지가 있다. 예를 들어 정치권력의 유지라든가, 권력 구조의 변화 혹은 혁명 등 추구하는 목표와 그에 따른 기능이 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비판에 거부적이다. 비판이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문은 가치와 진리를 추구하되, 그것을 수단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하거나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려 하지 않는다. 학문의 정체성은 어떠한 비판에도 열려있으며 정치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할 때 보존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권력이 요구하는 이념, 즉 정치적 기능을 달성하는 이데올로기와 학문 사이에는 태생적 차이가 존재한다.


학자가 권력에 편승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려고 하면, 그는 이데올로그가 된다. 그러나 학자가 순수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이론 작업에 전념한다면, 그 이론에 결함이 있더라도 그는 이데올로그가 아니다. 어떤 이론과 주장이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의 이익과 별개로 객관적인 분석과 전망에 기초할 경우 그것은 학문의 범주에 속한다.


이데올로기가 아닌 학문/과학을 요구하는 시위 현장의 모습. https://eidgenossen.medium.com/ideology-and-practice-43a7e512f0f7
이데올로기가 아닌 학문/과학을 요구하는 시위 현장의 모습. https://eidgenossen.medium.com/ideology-and-practice-43a7e512f0f7

5. 이데올로기 갈등의 극복을 위한 첫 번째 제언

     

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 자본주의 생산양식에는 인간관계와 행위의 결과물로 생겨난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막대기를 물속에 넣으면 일직선인 막대기의 모습이 굴절되어 보이듯이 본질과 다른 사회 현상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다.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은 맑스는 헤겔이 사용했던 개념을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경제학 비판서인 『자본론』에 거론하면서 현상과 본질의 차이점을 말했다. 그러면서 현상과 본질이 같으면 학문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현상과 다른 본질을 알아내기 위해서 학문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려면 왜곡되고 전도된 현상의 본질을 학문적으로 밝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학문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대목이다.


둘째, 니체가 말했듯이 지배권력의 정치적 정당성을 합리화하거나 정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인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학문적 요소를 내포하고 진리인 것처럼 꾸민다. 그래야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는 의도적으로 현실을 왜곡한다. 불편한 현실로부터 출구를 제시하고 싸움/투쟁/전쟁에서 정적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다 보니 상대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를 조장하는 것은 보통이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데올로기가 가져다주는 이익만 강조하는 경향도 있다.


그 결과 비판적 분석을 통해서 이데올로기가 지닌 학문/진리적 외피를 드러내 보여도 무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이데올로기가 가져다주는 이익보다 손실이 더 크다는 점을 부각시키면 적어도 잘못된 현실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대안을 제시하면 좋겠지만, 설령 대안 제시가 어렵더라도 이데올로기의 사용이 가져올 파괴적 결과를 부각시키면 나쁜 이데올로기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없앨 수 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 사용이 당장은 정치권력에 이익을 가져다줄지 몰라도, 결국 국가와 국민의 삶을 위태롭게 하면서 정치권력을 몰락시킨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부각하는 것이 그 예에 해당한다. 이것은 국가이성적 관점에서도 중요하다. 이와 관련해서도 학문의 역할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일직선인 빨대가 빛의 굴절에 따라 물속에서는 휘어 보인다. 이것은 현상과 본질의 차이를 보여주는 가장 쉬운 사례다.
일직선인 빨대가 빛의 굴절에 따라 물속에서는 휘어 보인다. 이것은 현상과 본질의 차이를 보여주는 가장 쉬운 사례다.

다만, 니체가 말한 것처럼 학자의 진리 추구란 것이 오직 생존을 위한 수단과 구실에 불과하고, 학문적 행위의 동기도 대부분 학문과 거리가 먼 것에 – 예를 들면 권력에의 의지에 - 존재하는 현상이 문제다. 학자들이 권력에 기생하고, 권력을 위해서 이데올로기를 양산하는 그런 국가와 사회에서는 희망을 가질 수 없다. 현재 한국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 특히 언론에서 지식인들이 쏟아내는 글과 발언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오염되고 병들어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좌ㆍ우 이데올로그들은 자신들이 상대와 상대의 이론을 잘 모르면서 너무 쉽게 상대를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모르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론의 약점은 잘 모르면서 상대 이론의 약점만 비난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자기 이론의 약점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상대 이론의 약점을 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비판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의 말에 승복하게 만들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진실을 사랑하고 거짓을 미워하는 것과 정적에 대한 적개심을 조장하는 것은 다르다. 이 둘이 비슷한 외양을 갖고 있을 때도 있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어떤 주장이 특정한 목적을 갖고 상대에 대한 적개심을 조장한다면 이것은 명백히 이데올로기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이런 주장이 남발한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이분법과 함께 나의 약점은 숨기고 상대의 약점은 과장하면서 인간 관계와 사회를 파괴적 분위기로 몰아가기도 한다. 그 결과 나쁜 이데올로기가 확대 재생산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로 보이는 글이나 말을 평가하려면 좌ㆍ우 이데올로기를 어느 정도 균형 있게 알 필요가 있다. 한 쪽의 이론만 알고 다른 쪽의 이론을 모르면서 내가 아는 것은 진리라 주장하고 다른 쪽의 것은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데올로기가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라고 생각할수록 더욱 그렇다.


내 생각이 틀리고 상대의 생각이 맞다고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타인의 생각뿐만 아니라, 나의 생각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열려있는 자세로 나와 너의 생각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혼돈의 시대에 학문을 업으로 하는 학자들의 자기 성찰이 무엇보다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 「이데올로기 시대의 국가이성」 시리즈에서 두 번째 글은 2026년 1월 초에 게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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