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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국가이성

1. 문제 제기

2. 국가주의와 국가이성

   가) 국가주의와 국가이성의 차이

   나) 국가이성의 진화 혹은 퇴화

3. 민족주의와 국가이성

   가) 민족주의와 국가이성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괴리

   나) 국가 통합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민족주의

   다) 국가이성을 무력화시키는 분열의 민족주의

4. 소결: 민족주의의 두 얼굴과 국가이성의 진화 및 퇴화



1. 문제 제기

     

한국에서 좌파가 우파를 비판하는 것은 주로 시민사회를 억압하는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와 관련이 있거나, 친일 문제와 관련이 있다. 반면에 우파는 좌파를 빨갱이 프레임과 사회주의적 전체주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종북, 안보 및 반미 문제와 관련해서도 공격한다. 그러면서 좌파와 우파는 자기가 진정한 민족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이고, 상대방은 반(反)민족주의자이자 반(反)민주주의자 혹은 국가주의자라고 주장한다. 물론 좌파와 우파가 비판 수단으로 사용하는 국가주의의 내용은 다르다. 그럼에도 좌ㆍ우의 정치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결합한다. 그리고 역사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사회를 분열시키고, 국가 기능을 마비시킨다. 그런데 좌ㆍ우 진영을 막론하고 이런 비판을 일삼는 사람의 상당수가 자기 자신도 국가주의에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이렇게 하는 것일까?


국가주의를 상징하는 이미지. 출처: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의 저서 『전능한 국가』(Allmächtiger Staat)의 표지
국가주의를 상징하는 이미지. 출처: 루드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의 저서 『전능한 국가』(Allmächtiger Staat)의 표지

한국에서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은 주로 보수 정권의 권위주의적 국가주의, 즉 시민사회를 억압하는 국가주의에 대한 내용이 많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이 모두 좌파는 아니지만, 우파 정권을 비판하는 소재로 국가주의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정당한 비판은 권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좌파 정권의 국가주의도 있는데, 이런 국가주의에는 침묵한 채 우파 정권의 국가주의만 비판하는 것은 편향된 것처럼 보인다. 이래서는 좌ㆍ우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극복할 수 없다.


이재명 정권은 출범 후에는 물론이고, 야당 시절에도 다수당의 입법 독재를 통해서 법치국가의 근본을 흔들어 왔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재명 정권의 ‘법치국가 훼손’은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의 초법적 국가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문제는 우리가 좌파 정권과 우파 정권의 국가주의를 똑같은 잣대로 비판하느냐는 것이다.


 한국적 민족주의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2016년 10월 하순부터 2017년 3월 10일, 즉 박근혜 전 대통령(이하, 박근혜) 파면이 헌법재판소에서 결정될 때까지 누적 인원 약 1,600만 명이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이 촛불시위에는 국민의 상당수가 좌ㆍ우 진영을 넘어 참여하며 통합된 모습을 보여줬다. 마치 촛불시위가 직접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대규모 축제 같았다.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외친 광화문 촛불집회. 출처: YTN 뉴스 2026년 11월 12일, https://www.ytn.co.kr/_ln/0103_201611121902427785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외친 광화문 촛불집회. 출처: YTN 뉴스 2026년 11월 12일, https://www.ytn.co.kr/_ln/0103_201611121902427785

그런데 2017년에 출범한 문재인 정권이 대한민국의 건국절 논쟁(1948년이 아닌 1919년의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이라고 주장)과 한국군의 정통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적폐 청산’을 외쳤다. 그러면서 통합되었던 국민을 과거보다 더 심하게 좌ㆍ우로 분열시켰다. 촛불시위 이후에 한국 정치가 더 발전할 것처럼 보였던 희망 섞인 미래에 재를 뿌린 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통치 중반 무렵인 2020년 12월 9일에 「국민일보」가 실시한 ‘한국 사회 갈등 인식 조사’에서 국민의 73%는 문재인 정권 3년간 사회 갈등이 더 심각해졌다고 답했다. 편협한 민족주의와 역사 전쟁으로 과거를 소환해서 사회를 분열시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이 올바른 국가이성에 부합하는 것일까?


2022년에 출범한 윤석열 정권은 2023년 8월에 일제 식민지 시대의 독립운동가였던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하려고 했다. 홍범도 장군의 과거 소련 공산당 가입 및 활동 이력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의 정체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런 계획은 논란 끝에 결국 윤석열 전 대통령(이하, 윤석열) 탄핵 후 2025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 없던 일로 되었다. 그러나 이 논란을 통해서 윤석열도 방향만 반대로 바뀌었을 뿐 문재인과 똑같이 소모적인 역사 전쟁을 초래했다. 홍범도 장군이 1943년에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고, 1948년에 수립된 북한 정권이나 1950년의 6ㆍ25 전쟁과 아무 상관이 없음에도 그랬다.


홍범도 장군은 1962년 박정희 정부 시절에 이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받았고, 보수 정권에서도 공로를 인정한 인물이다. 그런데 윤석열이 이런 독립운동가의 전력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윤석열은 2025년 4월에 탄핵으로 물러나기 전까지 국민통합은 하지 않는 대신에 정부를 비판하는 세력과 사사건건 대립했다.


윤석열이 2024년 12월 3일에 계엄을 선포한 후에는 윤석열 탄핵에 대한 찬성과 반대 그리고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표에 대한 보수 진영의 반발로 한국 사회가 완전히 둘로 쪼개졌다. 국가 기능이 마비될 정도였다. 박근혜 탄핵 당시와는 너무 다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왜 이렇듯 한국에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정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면서 좌ㆍ우 양 진영의 대립을 증폭시키고, 분열의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을까?


윤석열 탄핵의 찬성과 반대로 갈라진 시위대 모습. 출처: 아이뉴스24, 2024년 12월 16일. https://v.daum.net/v/20241216110637504
윤석열 탄핵의 찬성과 반대로 갈라진 시위대 모습. 출처: 아이뉴스24, 2024년 12월 16일. https://v.daum.net/v/20241216110637504

2. 국가주의와 국가이성

     

가) 국가주의와 국가이성의 차이

     

국가주의란 국가가 경제 영역 등 시민사회에 개입하여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정치적 입장이다. 국가주의에는 국가가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믿음이 존재한다. 국가 자체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국가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복지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포함해서 국가의 이름으로 시민사회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형태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까지 다양한 종류가 존재한다.


현대적 관점에서는 국가가 디지털 사회의 가짜 뉴스를 판별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무엇이 진실이고, 가짜인지를 국가가 결정하도록 법을 제정하는 것도 국가주의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주의는 시민 개개인이 무엇이 진실이고, 가짜 뉴스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을 가정한다. 실제론 국가 지도층과 정치인들이 진실과 진리에 대한 독점 권한을 행사하면서 자신들에 대한 시민사회의 비판을 억제하려는 것이 주된 이유임에도 그렇다. 현재 중국의 인터넷 혹은 디지털 통제는 국가주의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유럽에서 국가주의에 대한 초기 비판은 자유방임과 최소국가(minimal state)를 주장한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국가가 치안과 국방 그리고 법질서 유지 등 최소한의 역할만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개인과 시장이 알아서 할 일까지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것이 바로 국가주의의 문제라고 말했다.


신자유주의자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k Hayek). 그의 대표작 『노예로의 길』(The Road to Serfdom)은 국가주의를 비판한 대표적 저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신자유주의자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k Hayek). 그의 대표작 『노예로의 길』(The Road to Serfdom)은 국가주의를 비판한 대표적 저서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경제 분야 종사자들이 기업의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기업의 경제적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정작 본인은 자신의 비판이 국가주의를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을 잘 모르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좌파 정치학자들이 국가주의 비판 담론을 주도했기 때문에 국가주의 비판이라면 좌파적 담론으로 생각하고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자유주의가 – 서구와 달리 짧은 기간에 - 제대로 정착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한 한국적 현실에서 우파는 박정희 정권이 국가 주도의 정책으로 경제발전을 이룬 것을 커다란 성과로 인정한다. 때문에 서양 학자들처럼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한국 정부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데 익숙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셋째, 기업인 혹은 경제 분야 종사자들은 국가의 규제를 비판하면서도, 기업 활동을 돕는 차원에서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필요할 때는 국가의 개입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국가주의에 대한 이들의 입장은 이중적이다.


그래서 한국의 우파가 좌파를 비판할 때, - 경제학자(자유주의자)를 제외하고는 –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시각에서 지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도 사실은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에 속한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은 다르다. 이들은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을 잘 하지 않는다. 스스로 국가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국가주의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사회(민주)주의로 포장된 국가주의에 대한 좌파 내부의 비판이 있다. 사회(민주)주의자가 옛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의 국가주의를 비판한 것과, 사회민주주의자의 국가주의를 비판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20세기 초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민당 정부 정책을 국가주의라고 비판한 사회민주주의자 내부의 지적은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국가주의와 국가이성은 다른 것이다. 국가주의는 이념 혹은 이데올로기이고, 국가이성은 국가의 생존과 작동 원리에 대한 통찰력, 즉 정치적 이성의 한 종류다. 16~17세기 근대 초기의 국가이성은 국가와 국익을 정치적 사고와 행위의 절대적 기준으로 내세웠던 국가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국가이성은 근대 초기에 점차 권력(자)의 이성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국가이성이 보수주의자의 전유물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국가의 생존과 작동 원리에 대한 통찰력은 보수주의자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자도 그리고 사회주의자도 자기 나름대로 국가의 생존과 작동 원리에 대한 통찰력을 추구한다. 이들 나름의 국가이성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자유주의자가 비록 국가이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고 사적인 행복 추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데 국가의 역할이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필자가 볼 때는 자유주의적 국가이성이다. 근대 초기의 보수적 국가이성이 국가이성의 시작이자 끝은 아니다. 그런데 마치 그런 것처럼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국가이성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국가이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기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가 현실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많이 보여준다고 해서 정치라는 개념 자체를 나쁘게 생각하며 기피하는 것과 같다. 이성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다. 이성이 권력과 돈의 수단으로 이용되며 문제를 초래한다고 이성이라는 개념의 사용을 기피한다면, 그것도 해결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와 이성의 내용을 어떤 것으로 채우느냐 하는 것이지, 정치와 이성의 개념을 기피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의 본질은 같아도,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은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 및 현대에 각각 다르다. 국가이성도 마찬가지다. 국가의 생존과 작동 원리에 대한 통찰력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이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프랑스와 독일의 국가이성이 다르고, 19세기와 20세기의 국가이성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각국에서 통치자의 철학과 정치 시스템 그리고 정치 문화 등이 다르고, 각국이 처한 대외적 상황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나) 국가이성의 진화 혹은 퇴화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으로 절대군주제가 입헌군주제로 바뀌고, 법치국가가 등장하면서 근대 초기의 국가이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봉건적 법ㆍ제도의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초법적ㆍ탈법적 정치 행위를 당연시했던 근대 초기의 국가이성이 법치주의 앞에서 명분을 상실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록 현실에서는 기존의 초법적 국가이성에 기반한 정치가 지속되었지만, 공식적인 담론에서는 한때 시대정신이었던 국가이성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근대국가를 뒤늦게 완성한 독일에서는 달랐다. 프로이센의 역사학자들은 19세기 중ㆍ후반에 프리드리히 대제(Friedrich Ⅱ, 통치 기간: 1740~1786년)가 국익을 위해서 헌신한 국가이성의 화신인 것처럼 소환하면서 국가이성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격상시켰다. 프로이센 중심으로 독일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랬다. 그러나 보다 빨리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통해서 법치국가를 추구했던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삼권분립 등을 통해서 법의 이성이 근대 초기의 국가이성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특히 자유주의를 추구했던 중산층 이상의 부르주아지(Bourgeois)들이 그랬다.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던 제2 제정기(1852~1870년)에 브르타뉴(Bretagne)의 투표소에서 보통선거에 참여하는 성인 남성들의 모습. 나무 신을 신고 예복을 입은 농민과 실크 모자를 쓴 부르주아가 투표소에 함께 있다. 출처: https://college.clionautes.org/4e_t3c1_-voter-en-france-de-1814-a-1870.html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던 제2 제정기(1852~1870년)에 브르타뉴(Bretagne)의 투표소에서 보통선거에 참여하는 성인 남성들의 모습. 나무 신을 신고 예복을 입은 농민과 실크 모자를 쓴 부르주아가 투표소에 함께 있다. 출처: https://college.clionautes.org/4e_t3c1_-voter-en-france-de-1814-a-1870.html

더 나아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노동운동의 증대와 보통 선거권의 확대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통제가 가능해지도록 만든 변수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국가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국가이성을 새롭게 고찰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국가이성이 국가의 안전과 생존을 무엇보다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근대의 국가이성과 현대의 국가이성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현대에는 입헌 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의 복지 증진을 통해서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을 새로운 국가이성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권력(자)의 이성을 국가의 이성과 동일시했던 근대 초기의 국가이성으로부터 국민의 삶과 국민의 집단 정치 이성을 고려해야 하는 근대 말/현대 초의 국가이성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한편, 국가주의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될수록 국가이성은 국가주의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민주적 국가이성은 – 이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 20세기에 특히 사회주의 국가에서 추구되어야 할 목표로 대두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국가주의를 사회주의자 내부에서 비판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수용되지 않으면서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20세기 후반에 몰락했다.


소련 공산당 제27차 당대회 모습. 공산당 지도부의 막강한 권위와 위세를 과시하는 모습이 좌석 배치부터 민주국가의 의회 모습과 많이 다르다.
소련 공산당 제27차 당대회 모습. 공산당 지도부의 막강한 권위와 위세를 과시하는 모습이 좌석 배치부터 민주국가의 의회 모습과 많이 다르다.

또한 20세기에 팽창적 민족주의 혹은 민족 이기주의는 국가주의와 결합하면서 파괴적 국가이성을 낳았고, 이것은 제국주의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국가의 이익 추구를 절대시하는 국가주의와 국가이성이 20세기에 국가를 망치는 위험한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특히 프로이센과 나치 독일에서 그랬다.


국가이성에 대한 유럽 학자의 기존 연구에서는 국가이성의 진화에 대한 내용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필자는 2024년 7월에 「정상돈의 이성과 정치」라는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그리고 동년 9월부터 「국가이성 시리즈」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국가이성에 대한 필자의 접근 방법과 유럽 학자들의 접근 방법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동시에 전통적 국가이성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재구성해서 우리 시대의 화두로 삼고 싶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필자는 국가주의에 반대한다. 그리고 국가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국가이성에 비판적이다. 그러나 국가가 필요한 일을 위해서 사회에 개입하는 것까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는 자유주의자의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필자는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됨에 따라 근대 초기에 없었던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고, 사회 갈등이 증대했다. 현대에서 탈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도 인간의 과열된 경쟁 속에 과학ㆍ기술의 발전, 특히 인공지능(AI)의 발전과 기후 변화로 인해서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0세기에 나타난 복지국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러나 인간은 21세기에 기후 변화가 초래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인공지능이 초래할 문제를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다.


국가가 인간의 자기 파괴적 성향을 극복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전적인 근대국가가 현대에 복지국가 등 새로운 형태로 변화했듯이, 탈현대의 사회에서도 국가는 당면하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변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가의 역할과 시스템이 변하는데, 국가이성이 진화하지 않고 초기 모습을 유지하거나 퇴보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앞으로 필자의 글에서 계속 다루어질 것이다.


3. 민족주의와 국가이성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국가이성의 관계는 세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민족주의와 국가이성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 있다. 둘째, 민족주의가 국가 통합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면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발전에 간접적으로 기여하는 측면이 있다. 셋째, 잘못된 민족주의가 분열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면서 국가이성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이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민족주의와 국가이성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괴리

     

민족주의는 민족의 단합/통합과 민족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 반면에 국가주의와 국가이성은 국가의 생존과 안전 및 국가의 이익을 지고의 가치로 생각한다. 단일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세워서 민족국가를 만들고, 민족주의가 정상궤도를 이탈하지 않는 한 민족주의와 국가이성에 괴리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이나 한반도에서처럼 같은 민족이 두 개의 국가에서 갈라진 채로 살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분단국에서 민족주의를 앞세우면 통일이야말로 추구해야 할 최우선적 가치가 된다. 그러나 국가이성을 앞세우면 민족보다 분단국의 생존과 안전이 우선시될 수 있다. 분단국에서 궁극적으로 통일을 추구하더라도, 통일되기 전의 상황에 따라서 국가이성과 민족주의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민족주의가 국가이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이성도 민족주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쌍방향에서 생각해야 한다. 분단 체제에서 국가이성이 강력해도, 민족주의가 국가이성보다 더 강력하면 국가이성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반면에 국가이성이 합리적이면 감성적    인 민족주의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후 옛 동독(이하, 동독)은 옛 서독(이하, 서독)과의 관계에서 ‘두 국가, 두 민족’을 주장했다. 자본주의 국가 서독과 사회주의 국가 동독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 서독의 민족과 사회주의 체제 동독의 민족을 구분해서 주장한 것이다.


1961년 8월 13일에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동독 주민을 막기 위해서 장벽을 건설하는 모습. 동서독 분단 상황에서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약 270만 명에서 300만 명에 달하는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1961년 8월 13일에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동독 주민을 막기 위해서 장벽을 건설하는 모습. 동서독 분단 상황에서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약 270만 명에서 300만 명에 달하는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그런데 1989년에 동독에서 분출한 시민들의 민족주의는 동독의 국가이성을 무력화시키고 1990년에 서독과의 통일을 추구했다. 민족주의와 국가이성 사이에 존재했던 괴리를 극적으로 해결한 것이다. 한편, 서독은 민족주의와 국가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인정했다. 서독은 패전국으로서 미국과 소련, 영국 그리고 프랑스의 견제 속에 자주적으로 통일할 수 없었다. 때문에 분단 상황을 인정하고,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고통을 줄인다는 차원에서 동서독 교류ㆍ협력을 통한 분단 관리 정책을 추진했다.


이 정책으로 동서독에 갈라져 살던 이산가족들이 왕래하며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정책은 동독 주민들의 민족주의를 회복시키면서 ‘두 독일 국가’를 하나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동독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두 국가론 과 두 민족론’으로 분단 체제를 유지하려 한다고 해서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독일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부에 민족주의 과잉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전 세계에 재앙을 초래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은 이를 부끄러워하며 대외적으로 탈(脫)민족주의를 지향했다. 민족주의를 거론하는 자체가 금기사항이었던 시대적 분위기에서 서독의 유럽 지향적 탈민족주의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동독을 상대로는 민족주의를 추구했다. 동독이 서독에게 동독을 외국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철저하게 거부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분단 직후 서독에서 동독 문제를 담당했던 부서의 명칭은 1949년부터 1969년까지 전(全)독일문제부(Bundesministerium für gesamtdeutsche Fragen)이었다. 이 명칭에는 동독은 국가가 아니고 오직 서독만이 정통성을 가진 국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이하, 브란트) 총리가 1969년에 집권해서 신(新)동방정책을 추진하며 이 부서의 명칭을 내독관계부(Bundesministerium für innerdeutsche Beziehungen)로 바꿨다. 동서독 교류ㆍ협력을 염두에 둔 것인데, 동독을 서독과는 별개의 국가로 인정하되 외국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동서독관계를 내부 관계/내독 관계로 표현한 것이다.(1 민족, 2 국가) 그리하여 서독은 동베를린에 대사관이 아닌 상주대표부(Ständige Vertretung)를 설치했다.


동베를린 주재 서독의 상주대표부와 그 앞을 통제하던 동독 경찰의 모습.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후 1974년에 설립되어 분단 체제를 잇는 창구 역할을 했다.
동베를린 주재 서독의 상주대표부와 그 앞을 통제하던 동독 경찰의 모습.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후 1974년에 설립되어 분단 체제를 잇는 창구 역할을 했다.

이렇게 서독은 유럽 등 대외 문제에서는 탈민족주의를 지향하면서, 동독을 상대로는 민족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ährung) 정책을 추구했다. 이것이 1970년대 이후 서독의 국가이성과 민족주의였다. 19세기 중ㆍ후반 프로이센의 국가이성은 전쟁(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의 전쟁)을 벌여서라도 통일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ㆍ후반, 특히 브란트 총리 집권 후 서독의 국가이성은 친서방정책과 신동방정책 및 분단 관리 정책으로 변했다. 헬무트 콜(Helmut Kohl)은 1982년에 10월 1일에 총리로 취임한 후 10월 13일 정부 성명에서 “우리의 친구들과 동맹국들, 그리고 전 세계의 파트너들은 우리 정책의 강직함(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을 믿어도 좋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동맹은 독일 국가이성의 핵심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국가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다. 서독은 이 새로운 국가이성으로 1990년에 통일을 달성했다. 19세기와 다른 방식의 국가이성으로 통일을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같은 민족끼리 1950년에 전쟁을 하고 무력으로 통일을 추구하더니, 이젠 ‘두 국가론’이 등장하고 있다. 이 ‘두 국가론’을 처음 주장한 것은 북한의 김정은이다. 2023년 12월 30일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되었다고 선언하면서다.


그러자 문재인의 비서실장이었던 임종석은 2024년 ‘9ㆍ19 평양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 기조연설에서 “통일, 하지 맙시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통일을 버리고 평화를 선택하자”며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두 개의 국가로 살아가자는 견해를 제시했다. 정동영 현 통일부 장관(이하, 정동영)도 2024년 같은 행사에 민간인 신분으로 참석해서 비슷한 취지로 말했다. 그러더니 정동영은 2025년 9ㆍ19 평양공동선언 7주년 기념식에서 ‘평화적 두 국가론’을 이재명 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남북한이 1948년부터 두 개의 국가로 존재하고, 1991년에 두 개의 국가로 유엔 회원국이 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김정은이 2023년에 ‘두 국가론’을 주장하기 전에는 남한에서 누구도 ‘두 국가론’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김정은이 ‘두 국가론’을 주장하자, 이에 호응하듯이 남한의 전ㆍ현직 고위당국자가 ‘두 국가론’을 공식화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임종석은 심지어 “통일에 대한 지향과 가치만을 헌법에 남기고 모든 법과 제도, 정책에서 통일을 들어냅시다”라며 통일부를 정리하자는 취지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도 했다.


이것은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하는 우스운 이야기다. 평화를 위해서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하지만, 그런다고 평화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김정은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남한만 ‘평화주의’에 입각해서 평화를 외친다고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임종석과 정동영의 ‘두 국가론’은 민족주의에도, 그리고 올바른 국가이성에도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은 2020년 6월 16일에 남한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일방적으로 폭파하고, 다음 날 보란 듯이 폭파 장면을 공개했다. 그리고 2022년 3월과 4월에는 ‘남북 사이의 투자 보장에 관한 합의서’를 위반하고 현대아산 소유의 해금강 호텔 등 남측 자산 대부분을 철거했다. ‘남북 합의’를 위반하고, 개성공단 소재 남측 시설과 자산을 무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북한 당국이 2020년 6월 16일에 개성 소재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모습. 출처: 아주경제 2020년 6월 17일. https://www.ajunews.com/view/20200617090423243
북한 당국이 2020년 6월 16일에 개성 소재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모습. 출처: 아주경제 2020년 6월 17일. https://www.ajunews.com/view/20200617090423243

북한의 이런 만행은 20세기 후반 동서독 관계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북한을 돕기 위해서 정동영은 통일부 장관으로 적극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격을 스스로 포기한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정부의 대북정책은 과연 국가이성에 입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국가이성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일까?


김정은은 2022년부터 어린 딸 김주애를 후계자로 나타내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당시 김주애 나이는 9세였다. 이것은 현대의 어떤 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김정은이 건강에 자신 있다면 이렇게까지 안 할 것이다. 북한이 비록 핵무기를 가졌지만, 내부적으로 불안정 사태 혹은 급변 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옛 소련도 핵무기를 가졌지만 결국 붕괴했다.


북한의 급변 사태 가능성이 증가하는 시점에 남한의 고위당국자가 ‘두 국가론’을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반민족적인 행동이다. 이런 행위는 훗날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옛 동독의 ‘두 국가론’과 ‘두 민족론’이 실패했듯이, 김정은과 정동영의 서로 다른 ‘두 국가론’도 결국 실패할 것이다. 문제는 남한의 일부 당국자들이 갖고 있던 대북 지렛대(대북방송)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면서 무(無)전략으로 북한에 굴종한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북한이 남한을 더 우습게 보는데도 그렇게 하고 있다.


나) 국가 통합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민족주의

     

민족주의는 18~19세기에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에서 통합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졌다. 프랑스에서는 절대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제를 세우는 혁명(1789년) 과정에서 신분과 계급을 넘어 사회 구성원을 민족 혹은 국민으로 통합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주의가 만들어졌다. 프랑스 혁명을 무력화시키려 했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등 외부 세력의 개입에 대항해서 민족주의를 내부적으로 동원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절대국가에서는 민족과 국민 그리고 시민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에 신민(臣民)이라는 개념이 사용되었다. 민족과 국민 개념에는 신민과 달리 공동체 구성원의 평등성을 지향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민족 구성원들의 평등한 관계를 토대로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의미의 평등성이 그것이다.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대혁명 후 새로운 체제의 구성원을 민족 및 국가와 일체화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민족국가는 국민 통합의 기초 위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민족국가(Nation-state)의 성립이 구체제를 전복한 프랑스 대혁명 후에 이루어진 것이 우연이 아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근대국가는 영토국가(Territorial state)라고 부른다.


민족주의는 어떤 세력이 주도하느냐, 그리고 기존 질서를 개혁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느냐 아니면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 개혁 운동을 저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좌파의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고, 우파의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한다.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전개되었던 민족주의는 좌파적 성향을 띠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지가 자유주의를 추구했는데, 이들은 당시 좌파에 속했다.


프랑스 대혁명 후 의회에서 의장석 기준으로 좌석 배치에 따라 좌파와 우파라는 명칭이 통용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후 의회에서 의장석 기준으로 좌석 배치에 따라 좌파와 우파라는 명칭이 통용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후 의회에서 자유주의자와 자코뱅파(Jacobins, 급진주의자)는 의장의 왼쪽 좌석에 앉았고, 왕당파와 귀족 및 성직자 등 보수주의자는 오른쪽에 앉았다. 그래서 당시에는 자유주의자와 자코뱅파를 좌익으로 불렀고, 보수주의자는 우익으로 불렀다. 지금과는 다른 구분이다. 한편, 독일의 근대국가 완성과 통일 제국 건설 당시에 민족주의는 보수적인 군주와 귀족들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다. 독일에서는 자유주의자들이 1948년의 3월 혁명(Vormärz) 당시에 노동자 및 농민과 연대했으나, 혁명이 무산된 후 보수주의자들과 연대하여 통일을 추구했다.


19세기 초 39개 소국가의 느슨한 집합체였던 독일에서는 나폴레옹의 침입에 대항하여 1813년부터 민족주의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모든 계층과 정치 진영을 단결시키는 촉매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운동은 흩어져 살던 독일인들이 자신을 같은 민족으로 느끼게 하면서 독일 국민으로 만들어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때문에 독일에서 최초의 민족주의는 외부(특히 프랑스)의 침략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약 60년 후인 1871년에는 프로이센이 주도하여 통일 제국이 탄생하고, 근대 독일 국가가 완성되었다. 이후 독일의 민족주의는 19세기 후반에 있었던 많은 혼란과 경제 위기 극복 과정에서 국민 통합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    다. 이런 경향은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지속되었다.


중요한 것은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좌파에 의해서든, 우파에 의해서든 통합의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민족주의가 국민을 분열 속에 몰아넣은 현상은 근대국가가 탄생한 지 40여 년 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칼 맑스(Karl Marx)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는 1848년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에서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말하면서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촉구했다.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가 민족주의 대신에 국제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보-불 전쟁에서 승리한 후 1871년 1월 18일에 적지인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거행된 독일 제국 초대 황제 빌헬름(Wilhelm) 1세의 즉위식. 가운데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마르크(Bismarck)다. 출처: 뉴스1 2025년 12월 6일. https://www.news1.kr/life-culture/book/5999457
보-불 전쟁에서 승리한 후 1871년 1월 18일에 적지인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거행된 독일 제국 초대 황제 빌헬름(Wilhelm) 1세의 즉위식. 가운데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이 비스마르크(Bismarck)다. 출처: 뉴스1 2025년 12월 6일. https://www.news1.kr/life-culture/book/5999457

그런데 독일의 좌파였던 사회민주당(SPD) 지도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민족주의 차원에서 우파인 프로이센 정권에 협조했다. 이에 반발해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립크네히트(Karl Liebknecht) 등은 사민당(SPD)을 떠나 독립사민당(USPD)를 만들었다. 수정 사회주의자 에듀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USPD는 다시 분열하면서 독일 노동운동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이론과 달리 현실에서는 민족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더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사회주의 국가였던 옛 소련과 중국 사이에 그리고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 갈등이 존재했다. 맑스의 주장과 달리 사회주의가 각국의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한계를 나타낸 것이다.


다) 국가이성을 무력화시키는 분열의 민족주의

     

18~19세기의 유럽과 달리 20세기 한반도에선 민족주의가 분열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이런 현상은 1945년 이후 해방 정국에서 근대국가를 만든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이 분열의 민족주의는 역사 전쟁의 소재로 활용되면서 회복이 어려울 정도로 우리 사회를 갈라놓고 있다.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에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분할 점령되었다. 당시 시급한 과제는 외세의 분할 점령을 극복하고, 어떻게 독립된 통일 조국을 건설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사항은 한반도를 38선 중심으로 분할 점령한 미국과 소련의 대(對)한반도정책이었다. 대내적으로는 분열된 좌ㆍ우 진영을 통합하고, 민족의 힘을 모아서 외세의 대한반도정책에 지혜롭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해방정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분열된 민족의 힘을 모으는 데 실패했다.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문제로 좌ㆍ우가 대립하더니, 누가 민족주의자 혹은 반민족주의자인지를 둘러싼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의 결과는 1948년에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대립하는 이념을 추구하는 국가의 건설이었다. 2년 후인 1950년에는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끔찍한 전쟁을 벌였다. 다시 30여 년 후인 1980년대 중반에는 남한 사회에서 북한의 민족주의를 추종하는 소위 주사파(주체사상파; NL)가 저항 담론을 주도하면서 해방 정국의 분열된 민족주의를 재현했다.


해방 정국에서 「신탁통치 절대 반대」와 「3상 결정 절대 지지」로 갈라져 대립한 좌익과 우익의 모습. 출처: 통일뉴스 2021년 3월 29일.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1576
해방 정국에서 「신탁통치 절대 반대」와 「3상 결정 절대 지지」로 갈라져 대립한 좌익과 우익의 모습. 출처: 통일뉴스 2021년 3월 29일.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1576

「민족주의 = 반(反)외세」라는 등식은 북한 민족주의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것이 1980년대 중ㆍ후반 남한에서 저항 세력의 핵심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동시에 반미(反美)주의가 확산되었다. 정치인들만 민족주의를 분열의 이데올로기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민중을 대변한다는 운동권 세력도 민족주의로 좌ㆍ우 대립과 남남갈등을 심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해방 정국의 반탁운동을 했던 우익은 잘못 했고,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안을 지지했던 좌익이 옳았다는 주장 등으로 역사 전쟁이 점화되기도 했다.


해방 정국에서는 찬탁과 반탁 문제로 좌익이 우익을 미국의 괴뢰라고 불렀다. 반면에, 우익은 좌익을 소련의 괴뢰라고 부르며 싸웠다. 이 와중에 김구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하, 김구)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1949년에 북한을 방문하고 김일성과 외국군 철수에 합의했다. 당시 이 합의 때문에 주한미군이 철수한 것은 아니지만,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1년 후 북한은 남한을 침공했다.


그런데 김구가 북한을 방문한 지 40년 후에 재야 운동권 지도자 중 한 명인 문익환 목사(이하, 문익환)도 1989년 3월 25일에 김일성을 만나러 평양을 방문했다. 그리고 김일성과의 회담을 토대로 1989년 4월 2일 만수대 의사당에서 「문익환-허담」 명의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문익환은 동년 4월 3일 귀국길에 오르면서 1948년 4월에 김구가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으며 읊었던 시를 인용하기도 했다.


옛 동독과 북한이 외형적으로는 같은 사회주의를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근본적으로 달랐듯이, 서독의 좌파(사민주의자)와 한국의 좌파 운동권(저항 세력)은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걸었다. 민족주의가 표현되는 방식도 달랐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주사파가 한국 저항 세력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나 한때 저항운동을 주도했던 것은 사실이다. 주사파는 1990년대 초에 북한이 동독처럼 붕괴하지 않고 건재한 것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이런 분열의 민족주의는 국가이성의 정상적인 작동을 방해하고 국가이성을 무력화시킨다.


대학가 주사파의 기획으로 밀입북한 임수경(당시 한국외대 학생)이 1989년 7월 27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기 직전의 모습. 출처: 주간조선 2016년 12월 31일.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71
대학가 주사파의 기획으로 밀입북한 임수경(당시 한국외대 학생)이 1989년 7월 27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기 직전의 모습. 출처: 주간조선 2016년 12월 31일. https://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71

제2차 세계대전 후 1949년에 수립된 서독은 외교ㆍ안보 차원의 주권을 정상적으로 회복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서독은 친서방정책으로 미국에 의존했다. 그러면서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에 대항하고, 민주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과거의 군국주의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다. 「민족주의 = 반외세」라는 등식대로라면, 한국의 주사파는 서독의 친서방정책을 반민족주의적이었다고 평가해야 한다. 이것이 당시 서독의 생존과 안전을 위한 필수조건, 즉 국가이성이었는데도 말이다.


한국 좌파의 민족주의는 ‘우물 안 개구리’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주의적 국가이성에 기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 우파는 최근 윤석열의 사태에서 나타났듯이 철학의 빈곤과 국가주의로 인한 병폐를 많이 보여준다.

     

4. 소결: 민족주의의 두 얼굴과 국가이성의 진화 및 퇴화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에서 민족국가는 민주적 제도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프랑스에서 민족주의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대혁명 시기에 민족주의는 대내외적으로 “자유(Liberté)와 평등(Égalité) 그리고 박애(Fraternité)”를 혁명의 구호로 내세웠다. 여기서 평등은 대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국제관계에서 각 민족의 평등을 의미했다. 비록 이러한 자유주의적이고 해방적이었던 의미가 훗날 나폴레옹에 의해서 후퇴했지만, 대혁명 당시에는 그런 의미를 내포했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도 프랑스 헌법에서 추구해야 할 지향점으로 명시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발전이 민족주의와 민족국가가 가져온 업적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프랑스와 영국 등 민족국가는 민주적 제도를 정착시킨 발전 모델로 인식되었다. 물론 민족 구성원의 평등한 관계를 토대로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건설한다는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토대가 되면서 간접적으로 기여한 부분이 있다.


또한 동서독이 1990년에 통일되고 민족국가로 되는 과정에서 동독 주민들의 자유와 인권이 회복되었다. 이런 점에서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통일을 통해서, 즉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면서 민족주의가 간접적으로 기여한 것이지 동독 시민들의 민족주의가 동독 체제를 내부적으로 민주화시킨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발전은 별개로 평가하는 것이 맞다.


실제 역사를 보면 민족주의가 민주주의 발전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에서는 극단적 보수세력이 정치ㆍ경제적 위기 속에서 대내외적으로 민족의 적을 만들고, 민족 감정을 부추기는 가운데 국민이 느끼는 불안의 원인을 이들(민족의 적)에게 돌림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무능력을 은폐하고자 했다. 이런 가운데 민족 이기주의가 국가주의와 결합하면서 파괴적 국가이성을 낳았다. 독일 민족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어떤 범죄도 정당화하는 파시즘이 등장하기도 했다. 민족주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데 이용된 것이다. 이것은 민족주의가 지니는 커다란 위험 요인이다. 민족주의를 일반화시켜서 긍정적으로만 말할 수 없는 이유다.


민족주의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는 민족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이데올로기다. 특히 민족자결주의를 추구하는 민족주의가 문제시될 것은 없다. 민족자결주의는 국제주의와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만약 민족주의가 프랑스 대혁명과 동서독 통일에서처럼 개인의 자유와 인권 신장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면 민족주의는 좋고, 유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민족주의는 국가이성의 진화와 병행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배타적이고 공격적이 되면 타민족과 소수민족을 억압하고 이들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는 수단이 된다. 그렇게 되면 민족주의는 부정적 이데올로기가 되고, 국가이성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된다. 민족주의가 한국에서처럼 국가 기능을 마비시키고 국가이성을 무력화시키는 분열의 민족주의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18년에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이 선포한 14개조 원칙(The Fourteen Points)을 통해서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주의가 확산되면서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럽에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 세계 식민지에서 많은 신생 민족국가가 등장했다. 그런데 이들 국가에서 민족주의가 민주주의 발전에 장애가 되는 현상이 많이 나타났다. 민족주의가 국가주의와 결합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도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1945년 8월 15일에 거행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 축하식. 출처: 월간조선 2018년 7월 17일(8월호).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F&nNewsNumb=201803100045
1945년 8월 15일에 거행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 축하식. 출처: 월간조선 2018년 7월 17일(8월호).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F&nNewsNumb=201803100045

한편, 독일과 달리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대내적으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정착시키는 가운데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로 타민족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왜 대내적으로 민주적 제도에 기반했던 영국과 프랑스의 입헌적 국가이성이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를 택하면서 파괴적인 전쟁으로까지 갔을까? 국가가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이성, 즉 국가이성이 어떻게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전개하면서 스스로를 파괴하는 광기로 변질되었을까? 진화된 국가이성이 ‘우리(Nation)’이라는 경계에서만 작동하고, 대외적으로는 작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내부의 모순이 외부의 모순으로 나타나서 그런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인간의 자기 파괴적 속성을 해소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일까? 이런 비극적 역사 후에 국가이성은 또 어떻게 변화했을까? 민족/국가라는 경계를 넘어서 국제주의라는 더 큰 이성으로 국가이성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위기 속에서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과거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본 원고는 근대의 국가이성에 대한 마지막 글이다. 국제주의는 다음부터 시작되는 현대의 국가이성 시리즈에서 언급되기 시작할 것이다. 위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서너 편의 글에서 찾아볼 것이다. 동시에 한국 정치의 문제점과 이데올로기 갈등의 극복을 위한 방안도 계속해서 찾아볼 것이다.

     

※ 이런저런 사정으로 원고 게시가 애초의 계획(4월 초)보다 늦어졌습니다. 다음 글은 7월 말 혹은 8월 초에 게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정에 따라 일정에 다소 변경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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