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최종 수정일: 1월 3일

  1. 문제 제기

  2. 자유주의

  3. 보수주의

  4. 사회주의

  5. 종합 평가

  6. 이데올로기 갈등의 극복을 위한 두 번째 제언

     

     

  1. 문제 제기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말과 글 그리고 행동에 책임질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현재의 모습과 다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좌ㆍ우 양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적대적으로 비난하는 가운데 그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물론 비판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비판이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기도 하다.


문제는 비판과 비난의 수위다. 자신과 상대를 포함해서 함께 살고 있는 사회 공동체와 국가를 파괴할 수준으로 싸운다면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요즘 우리 주위에서는 건전한 상식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조차 소셜미디어(SNS)에서 상대를 비난하고 욕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이런 편 가르기의 뿌리에는 이데올로기적 사고가 있다. 내 생각은 맞고, 상대의 생각은 틀리거나 나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무슨 기준으로 이렇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정말 우리가 주장하는 혹은 상대가 주장하는 생각과 이념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싸우는 것일까? 만약 잘 모르면서 책임질 수도 없는 생각으로 공동체를 파괴할 정도로 싸운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후 우리 사회에서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사회주의가 웃음거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서유럽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입지를 굳힌 사회민주주의조차 우리 사회에서는 금기시되고 있다. 그 정도로 ‘사’자(字)는 공포와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과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정치인들은 자기 생각을 애매모호하게 표현한다. ‘진보적’ 이념 혹은 정의로운 이념으로 포장하면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이데올로기로 비판한다. 거꾸로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이념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면서 ‘좌파’들의 주장은 이데올로기라고 비난한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것일까?


만약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모두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면 왜 역사 속에서 변화 과정을 겪었을까? 각각의 이념이 완벽하다면 변화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들은 서로 경쟁하고, 영향을 미치면서 변화했다. 19세기의 자유주의와 20세기의 자유주의가 다르고, 19세기의 보수주의와 20세기의 보수주의도 같지 않다.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1830년 7월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을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가 그린 그림이다. 제목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이다. 이 혁명은 19세기 초 자유주의가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국과 프랑스에서 노동계급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출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혁명은 다시 1848년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1830년 7월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을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가 그린 그림이다. 제목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a liberté guidant le peuple)이다. 이 혁명은 19세기 초 자유주의가 새롭게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국과 프랑스에서 노동계급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출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혁명은 다시 1848년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각각의 이념들이 형성되면서 가정했던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을 수정하도록 강요한 객관적 사실 때문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념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 외에 환경의 변화에 따른 정치적 판단 역시 이념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유럽의 정치인들에게는 자신이 주장하는 이념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유권자로부터 외면당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반면에 일당독재였던 구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권력자들이 이런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변화를 시도하지 않다가 몰락했다. 이런 것들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모두 정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그리고 사회주의가 역사 속에서 변화한 과정을 알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지지하는 이념과 싫어하는 이념에 대하여 잘 모르면서 주장하거나 비난한다면, 어떻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책임질 수 있을까? 또한 그 결과가 우리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한국에서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는 진영을 가를 때,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거나 우파와 좌파로 구분하지 않는다. 대신에 보수와 ‘좌파’로 진영을 나눈다. 여기서 ‘좌파’란 혐오의 대상이다. 그리고 ‘보수’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같은 진영에 포함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구분이다.


유럽에서 보수주의는 프랑스 대혁명(1789년) 후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이념이다. 18-19세기에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서로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정치적으로 싸웠던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한 예로 자유주의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국가보다 우선시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에서는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한다. 우파 속에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를 포함하면 맞지만, ‘보수’ 속에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를 포함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그러던 19세기의 보수주의가 20세기에 변화하면서 상대편 이념 중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라는 말이 생겼다.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영국의 대처 정부 때 보수주의는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와 결합했는데, 이것은 보수주의 내부에서 정체성 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한편, 유럽의 수정 사회주의인 사회민주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조화를 이루면서 자본주의를 보다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사회주의로 불리기도 하는데, 사회민주주의가 초기에 나타났을 때 만해도 사회주의를 지향했었다. 지금도 일각에서 사회주의를 꿈꾸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사실상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1917년 11월 소비에트총회에서 연설하는 레닌. 당시 성공한 혁명으로 레닌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1917년 11월 소비에트총회에서 연설하는 레닌. 당시 성공한 혁명으로 레닌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보수’는 사회민주주의를 사회주의와 동일한 것처럼 비난한다. 이것이 학문적으로 틀린 것인데도 정치적으로 그렇게 한다. 그러다 보니 좌ㆍ우 갈등이 색깔론과 정적 죽이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고자 본 원고를 쓰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 우선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해서 개괄적인 설명을 한 후 종합 평가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이데올로기 갈등의 극복을 위한 두 번째 제언을 시도할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근대, 즉 18~19세기 중심으로 설명하고 20세기 이념은 필요한 만큼만 최소의 범위에서 언급할 것이다. 본 원고가 <근대의 국가이성> 편에 속하고, 20세기는 추후에 게시할 <현대의 국가이성> 편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 방대한 주제가 지루하게 보이지 않도록 원고의 분량을 압축해야 하는 필자의 고민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2. 자유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즉 19세기의 자유주의는 시민사회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 그것이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이익도 충족시키고, 그럼으로써 수많은 경쟁자들의 개별이익으로부터 결국 사회 전체의 이익이 형성된다고 가정했다. 특히 경제적 자유주의는 상품 교환 및 수요와 공급 그리고 가격 형성 등 시장을 지배하는 법칙의 결과로 공동선이 저절로 형성된다고 가정했다. 따라서 국가가 시장 메커니즘에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국가의 관료적 개입이 자유경쟁의 자연스러운 메커니즘을 왜곡함으로써 시장의 자기조절 기능을 방해만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치적 자유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시장과 정치 영역에서 모두 적용되는 믿음이었다. 자유주의는 법의 지배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합리적 규칙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은 개인의 능력과 욕구 및 재능 등이 각각 달라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법적 평등이 경제적으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들어서는 안 되고, 각자에게 자기 몫이 가도록 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치가 잘못된 평등주의(Gleichmacherei)를 추구하면서 공정성의 기초가 되는 시장 법칙의 자연스러운 공정성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부의 원천이 금과 은을 축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중상주의를 비판했다. 대신에 인간의 노동이야말로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제약이 철폐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 시대의 선구자였다. 아담 스미스가 후대의 경제적 자유주의 태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기업인의 이익을 넘어서 노동자의 권리도 중시했다. 특정 계급의 이익을 넘어 사회 전체를 생각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후대의 경제적 자유주의자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를 고전 정치경제학의 선구자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경제적 자유주의의 시조라고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후대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아담 스미스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왜곡하면서 오해되는 부분이 있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부의 원천이 금과 은을 축적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중상주의를 비판했다. 대신에 인간의 노동이야말로 부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제약이 철폐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 시대의 선구자였다. 아담 스미스가 후대의 경제적 자유주의 태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기업인의 이익을 넘어서 노동자의 권리도 중시했다. 특정 계급의 이익을 넘어 사회 전체를 생각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후대의 경제적 자유주의자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따라서 아담 스미스를 고전 정치경제학의 선구자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경제적 자유주의의 시조라고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후대의 (신)자유주의자들이 아담 스미스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왜곡하면서 오해되는 부분이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 모두 원칙적으로 자유경쟁의 출발선상에서 평등을 주장한다. 그러나 자유경쟁의 결과로 생기는 측면을 고려하면서 평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후자, 즉 결과의 평등을 지지할 경우 능력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보장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능력 개발의 자극이 감소하게 되어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유경쟁의 결과로 불평등이 생기는 것은 똑같은 룰/규칙을 적용해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것을 능력주의(Meritocracy)에 따른 공정이라고 하는데, 인간이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개인의 소득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이에 따른 위상도 필연적으로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고전적 자유주의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 적어도 원칙적으로 - 근면과 절약 및 합리적 경제행위를 통해서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렇게 만들어진 사회질서는 정당하다고 말한다. 동일한 업적에 동일한 임금을 지불하는 등가교환의 원칙이 적용되는 것도 이 사회질서가 정당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부하는 방식으로 약자에게 주는 것은 시장 법칙의 ‘숭고한’ 정당성을 해치는 것이기에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는 사회복지국가의 재분배정책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돈과 권력을 소유한 자들은 자유롭지만, 생계를 위해서 아무 일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가난한 자들은 부자유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유주의자들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자유주의가 실행되는 과정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해에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와 평등은 공허하다는 주장과 함께 자유주의의 위기는 자유주의에 내재한 요소로부터 발생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애덤 스미스의 대표작인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1776년).
애덤 스미스의 대표작인 『국부론』(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1776년).

그럼에도 자유주의 논리에 따르면 시장과 국가의 법률이 조성하는 질서는 물리적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법칙과도 같이 확고부동한 것이다. 이같이 스스로 운행하면서 조화로운 상태를 달성하는 법칙과 질서에 개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그래서 국가의 역할은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고, 사적인 행복 추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는 데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자유주의의 논리대로 하면, 즉 외부/국가의 간섭 없이 경제가 저절로 굴러가도록 놔두면 시장의 자기조절능력이 완성될까? 그렇지 않다. 자유주의를 구현할수록 독점과 거대 자본의 특권 등 경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는 결과들이 나타난다. 자유경쟁의 결과로 자유경쟁이 약화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적 자유주의가 부정했던 국가 개입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자유주의자들은 국가가 개입해서 위기를 초래한다고 말하지만, 국가의 개입 없이 자유경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가운데 자본의 집중과 독점 현상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각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사회에서 조화롭게 공동선이 만들어진다는 이론적 가정은 현실에서 맞지 않는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은 경제위기가 무너진 균형을 회복시킨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면서 시장의 자동조절 메커니즘에 집착한다. 그러나 위기가 극복된 후에는 오히려 자본의 집중과 독점 현상이 심해진다. 불균형이 더 커진다는 말이다. 따라서 위기를 통해서 다시 조화가 이루어진다는 주장은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이다. 그리고 기술 발전에 의한 생산력 증진은 필연적으로 실업자를 만든다. 그런데 어떻게 노동시장에서 수요과 공급의 균형이 저절로 생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생산력 증진에 의한 과잉 생산과 실업자 증가에 따른 구매력 감소로 수요와 공급에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도 문제다.


이에 19세기 말에 자유주의의 정당성이 약화되는 동시에,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사회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들 중에서 빈곤과 질병, 편견, 무지를 자유에 대한 장애물로 보고 이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론가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수정 자유주의자 혹은 복지 자유주의자로 불리는 그린(Thomas H. Green, 1836-1882)은 자유를 소극적 자유(negative freedom)와 적극적 자유(positive freedom)으로 구분하고, 사회적 약자를 돕는 적극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시장의 한계를 인정하고 제한된 범위의 경제관리를 수용하기도 했다.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고용ㆍ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1936년)에서 자유주의 경제 패러다임에 도전했다. 미국을 비롯해서 많은 선진 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케인스의 경제정책을 채택했다.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는 『고용ㆍ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1936년)에서 자유주의 경제 패러다임에 도전했다. 미국을 비롯해서 많은 선진 유럽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케인스의 경제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것이 자유주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고전적 자유주의와 수정 자유주의가 충돌하게 되었다. 또한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케인스주의(Keynesianism)가 확산되면서 19세기의 고전적 자유주의 경제학은 도전받았다. 이랬던 케인스주의도 다시 1970년대 초ㆍ중반에 시작된 경제위기 속에서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 1899-1992)와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의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도전받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3. 보수주의

     

보수주의의 원칙을 최초로 제시한 사상가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다. 그의 생각은 저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 1790)에 나타나 있다. 버크는 프랑스 대혁명(1789)을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보았고, 혁명 이후에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분위기를 불온시했다. 계몽주의에 비판적이었으며, 자유주의가 기존의 정치적 질서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자유주의에도 바판적이었다.


당시 버크가 제시한 보수주의를 지지한 사람들은 귀족과 교회의 성직자 등이었다. 이들은 질서와 안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전제군주정치와 종교 및 전통적 권위, 규범과 세습 귀족의 특권 등 계층적 지배 질서를 추구했다. 그러나 나라마다 전통과 정치적 질서가 달랐고, 미국에는 세습 귀족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의 보수주의는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비교하면서 보수주의의 특징을 찾으면 다음과 같다. 자유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증진하기 위해서 주어진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을 역사가 합리적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반면에 19세기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자유주의가 그동안 당연시되고 진리로 여겨졌던 것들을 부정하도록 만들면서 바람직한 전통과 질서를 위협한다고 비판했다. 그렇다고 보수주의가 주어진 현실을 무비판적으로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프랑스 대혁명이 왜 발생했는가를 돌아보면서 구질서의 문제점과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고 자각하는 성찰의 계기로 삼았다.


19세기의 자유주의는 인간 개개인의 이기적 행동이 결과적으로 사회적 조화와 공공선을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가보다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하고 심지어 국가를 – 필요하지만 개인의 자유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 필요악이라고까지 말했다. 반면에 보수주의는 인간의 이기적 행동이 사회를 파괴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의 이러한 자기 파괴적 속성 때문에 국가와 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보수주의는 사회 공동체를 유기체와 같은 것으로 보고,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인이 유기체 전체보다 중요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동시에 유기체 전체를 보호하고 지키는 국가가 개인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 가치로 평가하지 않았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정치인이자 철학자다. 보수주의의 철학적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약 30년 가까이 휘그당 소속의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729-1797)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정치인이자 철학자다. 보수주의의 철학적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된다. 약 30년 가까이 휘그당 소속의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이성이 사회적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보수주의는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다고 보았으며, 불완전한 이성으로 갑작스럽게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공동체 전체에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오랜 세월에 걸쳐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온 시스템(예를 들어 국가와 왕실, 법과 권력기관 그리고 전통 등) 중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지키고 보존할 것과 – 만약 변화가 필요한 경우 – 점진적으로 기존 시스템에 새로운 요소를 보충해서 신중하게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보수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토대로 사회계약론에 입각해서 인위적으로 국가를 만든다는 입장도 부정했다. 대신에 국가는 이미 신으로부터 유래된 자연스러운 것(gott- und naturgewollte Autorität)이라고 당연시하면서 정당화했다. 버크는 귀족과 평민 그리고 하층민으로 구성된 계급 질서 속에서 하층민은 “노동하면서 후미진 길을 가도록 운명지어진 사람들”(『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층민이 귀족으로부터 보호받고 귀족에게 복종하면서 만족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동시에 특권으로 구성된 시스템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방식으로 보수주의는 시대와 계급을 초월해서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영원한 가치(anthropologische Wesenskonstanten), 즉 전통과 고향, 가정 및 국민과 공동체 등을 추구한다. 또한 스스로 자기 가치를 입증해 온 이런 것들이 정상적이고 건전한 상식에 부합하는 것이자 탈이데올로기적인 것(Ideologiefreiheit)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면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등 다른 이데올로기들이 보수주의의 건전한 상식에 맞서 스스로 주장하는 바를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의 이 같은 주장에는 증명되어야 할 가설을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증명이 필요 없는 것으로 말하는 논리적 오류가 들어있다. 만약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교육을 받는다면 세습 귀족의 자제들보다 하층민의 자제 중에서 훨씬 능력 있고 똑똑한 사람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가능성이 배제된 사회구조를 신이 부여한 자연스러운 질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습적 특권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하층민의 입장에서는 보수주의자의 자기중심적 주장이 수용되지 않는다. 인간이 처한 위치에 따라 동일한 현상이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거나 신의 뜻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19세기 초ㆍ중반 유럽 대륙에서는 극심한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정치 참여의 기회가 박탈된 상태에서 혁명 이외에 다른 탈출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848년에 혁명의 바람이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하고 유럽 전역을 광범위하게 휩쓸었다. 19세기를 혁명과 반동의 시대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이런 혁명이 신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 보였겠지만, 노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프로이센 총리였던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는 수많은 국가로 분열되었던 독일을 1871년에 통일시킨 주역이다. 외교의 달인이자 뛰어난 현실 감각을 지닌 보수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프로이센 총리였던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는 수많은 국가로 분열되었던 독일을 1871년에 통일시킨 주역이다. 외교의 달인이자 뛰어난 현실 감각을 지닌 보수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현실 속에서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한편으로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1883년부터 1889년까지 사회보장정책을 도입했다. 채찍과 당근을 병행하는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04-1881) 총리가 자유주의자들에 맞서 선거에서 중산층과 하층민의 표를 얻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고려 때문에 1867년에 선거법의 개혁을 시도했다. 도시 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을 확대하면서 정치적 연대를 시도한 것이다. 이렇게 보수주의도 19세기 말에 변화하기 시작했다.

     

4. 사회주의

     

산업혁명 후 18세기 초 남성의 하루 노동시간은 16시간 정도였다. 빈곤층의 여성과 어린이들도 생존하기 위해서 비인간적 조건에서 노동해야만 했다. 초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나타난 장시간의 노동과 절대적 빈곤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했다. 부유한 자들은 재산의 소유와 처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빈곤층은 고통과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원했다. 자유주의와 달리 초기 사회주의가 요구한 자유는 바로 불평등한 자유가 아니라, 평등한 자유였건 것이다.


초기 사회주의자들로는 생시몽(Saint-Simon; 1760-1825)과 푸리에르(Françoi Marie Charles Fourier, 1772-1837), 푸르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 그리고 오언(Robert Owen, 1771-1858) 등이 있다. 이들은 시장이 정의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결국 모순에 봉착하고, 사회통합을 저해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한편으로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이기심의 노예가 된 지배층과 다른 한편으로는 소외된 노동자로 갈라진다고 보았다. 이런 시각에는 억압받는 다수와 연대해서 이기적인 부자에 대항해야 한다는 도덕적 이분법 그 이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봉건제의 부정적 요소를 극복하는데 기여한 혁명적 요소는 무시되고,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되었다. 자본주의가 역사 속에서 사회ㆍ경제적으로 어떻게 기능하고, 변화될 수 있느냐 하는 부분에도 인식이 미치지 못했다. 자본주의 극복을 단순하게 의지의 문제로 귀결시킨 측면이 강했다.


이에 반해서 맑스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적 역동성이 어떤 법칙 속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밝혀내고자 했다. 이것이 맑스와 엥겔스가 17~18세기 초기의 사회주의들과 다른 점이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생산관계와 생산력의 모순 속에서 역사가 발전한다고 생각하며 자본주의가 내적 모순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전환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의지로 역사를 바꾸려는 초기의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주의’라 말하며, 자신들의 이론은 ‘과학적 사회주의’(Wissenschaftlicher Sozialismus)라고 불렀다.


이후 19세기 말에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은 맑스의 사상을 채택했다. 그런데 맑스주의자였던 에듀어드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이 1901년에 발표한 논문 “Wie ist wissenschaftlicher Sozialismus möglich?”에서 맑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 이의 제기를 했다.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개념이 독단적이고 도그마적인 성격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맑스주의가 과학적 사회주의로 명명된 만큼, 맑스주의에서 벗어난 사회주의 이론은 비과학적인 것처럼 잘못 인식될 수 있다는 취지에서였다.


베른슈타인(1850-1932)은 수정 사회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정통 맑스주의에 비판적이었던 그의 저작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민주당(SPD) 내부에서 수정주의 논란을 일으켰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제2차 세계대전 후 1959년 고데스베르그 강령을 채택하며 전통적인 계급정당을 탈피하는데 베른슈타인의 수정 사회주의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베른슈타인(1850-1932)은 수정 사회주의 혹은 사회민주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정통 맑스주의에 비판적이었던 그의 저작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민주당(SPD) 내부에서 수정주의 논란을 일으켰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제2차 세계대전 후 1959년 고데스베르그 강령을 채택하며 전통적인 계급정당을 탈피하는데 베른슈타인의 수정 사회주의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베른슈타인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용어 대신에 ‘비판적 사회주의’(Kritischer Sozialismus)’라는 개념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런 베른슈타인을 통해서 맑스주의에 대한 수정주의가 등장했다. 베른슈타인은 시장의 역할을 무조건 부정하지 않으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야만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베른슈타인의 구상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민주당 지도부와 당원들에 의해서 배척되었다. 당시 독일의 사회민주당은 말과 행동이 달랐다. 수정주의적으로 행동하면서도 수정주의 이론은 비난했고, 혁명을 설교하면서도 개량주의적으로 행동했던 점에서 이중적이었다.


그러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Bolschewiki)가 자신들을 수정 사회주의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라고 명명했다. 그러자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신을 공산주의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민주사회주의자라고 불렀다. 민주사회주의자들은 맑스주의에서 민주적 요소를 강조하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또한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있을 수 없다며 당과 국가의 운영도 민주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소련의 비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시장의 긍정적 역할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고, 시장의 폐지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혼합경제를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분열되어 힘을 쓰지 못한 채 히틀러의 파시즘(국가사회주의)에 의해서 무너졌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야 다시 세력을 회복하고, 더 이상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구조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경제 민주화와 사회복지국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사회주의와 다른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자본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 속에서 다시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진다.


한편,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은 20세기 초에 맑스주의에서 ‘프로레타리아 독재’(dictatorship of proletariat)를 강조했다.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던 레닌은 1919년에 제3 인터내셔널을 창건하고, 다른 국가의 공산당이 소련 공산당의 지도에 절대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경제적으로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추진하고, 계획경제를 실시했다. 레닌 사후에 스탈린은 맑스주의에 레닌주의를 추가해서 맑스-레닌주의를 소련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만들고,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동유럽 국가들을 자기 세력 하에 두면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동유럽의 민주사회주의자들을 억압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1959년 11월 14일 독일의 바드 고데스베르그(Bad Godesberg)에서 개최된 당대회에서 당시 베를린 시장이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가 발언하는 모습이다. 이 당대회에서 고데스베르그 강령이 채택되었는데, 노동자계급의 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빌리 브란트는 사민당의 새로운 노선을 주도하며 1969년에 사민당을 집권 여당으로 만들었다. 브란트가 추진했던 의 신동방정책은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되었다. https://www.cvce.eu/en/obj/willy_brandt_at_the_german_social_democratic_party_spd_congress_bad_godesberg_14_november_1959-en-98b6a66f-bcad-443f-89e3-39a44a1174ad.html
1959년 11월 14일 독일의 바드 고데스베르그(Bad Godesberg)에서 개최된 당대회에서 당시 베를린 시장이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가 발언하는 모습이다. 이 당대회에서 고데스베르그 강령이 채택되었는데, 노동자계급의 정당에서 대중정당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빌리 브란트는 사민당의 새로운 노선을 주도하며 1969년에 사민당을 집권 여당으로 만들었다. 브란트가 추진했던 의 신동방정책은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되었다. https://www.cvce.eu/en/obj/willy_brandt_at_the_german_social_democratic_party_spd_congress_bad_godesberg_14_november_1959-en-98b6a66f-bcad-443f-89e3-39a44a1174ad.html

5. 종합 평가

     

자유주의는 이성을 통한 사회의 발전을 믿었다는 점에서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었다. 그러면서 자유와 평등을 슬로건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극심한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에게는 이 슬로건이 전혀 설득력을 얻을 수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주의 논리로 개인의 자유를 확장시키는 것이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익부 빈익빈 속에서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을 외면하려 했다. 자유주의는 자신이 초래하는 부정적 결과를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수주의와 사회주의가 나타났다. 보수주의는 자유주의로 나타난 무질서와 사회불안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다. 그러면서 자유주의가 중시하는 이성을 전통과 질서를 파괴하는 요소로 이단시했다. 한편, 사회주의는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려는 인본주의에 입각해서 자유주의를 비판했다.


그런데 보수주의는 미래지향적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과거의 전통을 지키고 구질서를 보수하려고 했다. 그래서 사회ㆍ경제적 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정치적 과제에 제대로 대응하기보다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때가 많았다. 1970년대 중반에 케인즈식 국가개입주의가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자 보수주의는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면서 정체성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보수주의와 달리 사회주의에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강력하게 존재했다. 특히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적 속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새로운 미래가 도래한다고 생각한 점에서 그랬다.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적 폐단의 근본 원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함으로써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동시에 이기심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외된 자본주의적 인간상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간을 만들고자 했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로 인해서 발생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인간을 사회적 존재(gesellschaftliches Wesen)로 만드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단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것으로 새로운 인간을 만들 수는 없었다. 구소련의 공산당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념에 대한 모든 비판을 억압했다. 심지어 사회주의자 내부의 건설적인 비판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제시한 기준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소외시켰다. 자본주의보다 더 비인간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킨 측면도 있다. 그 결과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대신에 오히려 구소련 등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이 무너졌다.


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시위 모습. 당시 시위 주최 측과 현장 취재진은 최대 10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보도했다. 5일 후인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었고, 동독의 공산당 정권은 1990년 3월에 자유 총선거를 실시한 후 몰락했다. 동독의 시민운동가들은 시위 초기에 독일 통일이 아닌 ‘진정한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그러나 이런 구호는 점차 많은 시민들에 의해서 ‘독일 통일’로 바뀌게 되었다.
1989년 11월 4일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시위 모습. 당시 시위 주최 측과 현장 취재진은 최대 10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보도했다. 5일 후인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었고, 동독의 공산당 정권은 1990년 3월에 자유 총선거를 실시한 후 몰락했다. 동독의 시민운동가들은 시위 초기에 독일 통일이 아닌 ‘진정한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그러나 이런 구호는 점차 많은 시민들에 의해서 ‘독일 통일’로 바뀌게 되었다.

오늘날 사회주의적 전통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현재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청사진과 실현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면서 이론적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의 악과 부정의를 드러내는 가운데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윤리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대신에 수정 사회주의인 사회민주주의는 현실 정치 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시장경제를 수용하며 자본주의를 보다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도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국가에서 복지정책에 비중을 두려고 해도,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예산 등 여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추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화된 자본주의 경제의 경쟁 메커니즘 속에서 사회민주당이 이런 한계를 무시하고 정책을 추진하다간 선거에서 패하는 결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형제 사이에도 권력과 돈을 둘러싸고 싸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인간의 역사다. 심지어 세속적 욕심을 버리고 사는 종교인들도 자기들끼리 싸우고, 과거에는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인간의 의식 수준 등 이성적 측면은 제도와 교육을 통해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탐욕과 이기심 등의 감성은 변화시키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는 인간이 협동보다 경쟁을 추구하도록 강요하는 구조적 힘이 있다. 경제생활에서 협동하더라도 경쟁을 위한 협동을 추구한다. 경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같이 잘 살기 위한 협동은 찾아보기 어렵고, 그만큼 인간이 소외되면서 인간성도 상실한다.


맑스의 구상대로 자본주의가 변화되려면 새로운 인간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맑스 이론에 등장하는 프롤레타리아는 단지 관념적으로 만들어진 역사의 주체일 뿐이다. 현실 속의 노동자들은 자기 내부의 경쟁으로 분열된 상태다. 그뿐만 아니라 발전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사 간의 협상으로 정상 노동일(Normal Working Day)에 대한 타협이 이루어지는 한, 이념으로 무장되지 않은 노동자들은 착취당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시장에서 정상 노동시간/노동일에 대한 대가로 정당한 임금을 받아서 등가교환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 이데올로기 갈등의 극복을 위한 두 번째 제언

     

이 세상에 완벽한 이론은 없다. 일정 기간 쓸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념도 환경이 변화하면 한계를 보인다. 구소련 등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후 자유주의가 역사의 최후 승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 자유주의는 다시 보수주의와 사회(민주)주의자 양쪽으로부터 비판받고 있다.


현재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시장이 강제하는 무한경쟁이 인류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른다는 점이다. 특히 인공지능(AI)의 개발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멈추지 못한다. 당장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자유주의는 모든 이데올로기 중에서 경쟁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 덕분에 “앞으로는 인류가 금붕어가 되고, AI가 인간의 지위를 갖게 되는 모습이 펼쳐질 것”(손정의, 『조선일보』 2025년 12월 5일)이라고 한다.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은 인공지능(AI)의 미래 단계인 ASI(Artificial Super Intelligence)의 등장이 “질문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미래”고, 초인공지능(ASI)이 인간보다 1만 배 똑똑하다고 말한다. 이런 초인공지능(ASI)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2025년 12월 5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이재명 대통령과 면담하는 모습. 이 자리에서 손정의 회장이 위에 인용한 발언을 했다.(『조선일보』, 2025년 12월 5일.) https://www.chosun.com/politics/politics_general/2025/12/05/E63WB7PIQ5CFNPN55SPQZWOMXA/
2025년 12월 5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이재명 대통령과 면담하는 모습. 이 자리에서 손정의 회장이 위에 인용한 발언을 했다.(『조선일보』, 2025년 12월 5일.) https://www.chosun.com/politics/politics_general/2025/12/05/E63WB7PIQ5CFNPN55SPQZWOMXA/

각각의 이념에는 강점도 있지만, 약점도 있다. 그래서 이론/이념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열려있어야 한다. 이념이 역사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변화해 온 것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이데올로기 간의 격차는 19세기보다 20세기에 오히려 좁혀진 측면이 있다. 자신이 주장하는 이념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수정하기 시작하면서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는 19세기와 달리 20세기에 시장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유방임 정책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보수주의는 역으로 20세기에 국가의 효율성을 중시하면서 사회보장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능력 국가(Leistungsstaat)를 강조하는 가운데 자유주의적 요소를 도입했다. 그래서 뉴라이트(New Right)가 탄생했다.


물론 뉴라이트에도 자유주의적 뉴라이트와 보수주의적 뉴라이트 두 종류가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보수주의라는 개념이 탄생할 정도로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간격이 좁혀진 측면이 있다. 사회주의도 20세기에 근본(fundamental) 사회주의와 수정(revision) 사회주의로 확연히 갈라진다. 수정 사회주의는 시장의 역할을 인정하고, 절대적 평등이 아니라 상대적 평등을 주장하면서 근본 사회주의와 갈라섰다.


역사의 큰 흐름을 보면 이데올로기 간의 간격이 좁혀졌다. 하지만 한국에선 오히려 이데올로기 간의 갈등이 더 커졌다. 좌ㆍ우 양 진영의 이데올로기 갈등이 국가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다. 그런데 필자의 눈에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그리고 사회주의자가 이념적으로 갈등하고 싸우는 것이 마치 코끼리의 코를 만지면서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장님이 다리를 만지면서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장님과 싸우는 모습처럼 보인다.


각각의 이데올로기들이 현실의 일부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벽하지도 않은 이데올로기 때문에 우리끼리 목숨 걸고 싸우면서 사회 공동체를 파괴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물론 북한이나 다른 제3국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앞세워서 한국을 침공한다면 단연코 이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내부적으로 감정이 앞서 싸우면서 나라의 기반을 무너트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장님들이 코끼리의 신체 일부를 만지고, 그것이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모습이다.
장님들이 코끼리의 신체 일부를 만지고, 그것이 코끼리라고 주장하는 모습이다.

필자가 이데올로기 갈등의 극복을 위해서 두 번째로 제안하는 것은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현실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자는 것이다. 현실에서 구체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선택이 필요할 때는 전체 속에서 부분을 보며 해답을 찾으면 된다. 마치 환자의 병을 치료할 때 전체 몸 상태를 고려해서 특정 부위에 대한 치료 방법을 선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전체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특정 부위에 좋은 방법만 고집하다간 다른 부위에 부작용을 초래하면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이론이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변화한다. 그래서 이론도 변화하게 된다. 실천(Praxis)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고, 이론의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것은 공허하다. 선한 의도로 추진한 정책이 악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측면에서 실천을 통한 결과가 진리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결과만 좋으면 어떤 정책이든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만 진리로 보이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상황적 진리(Wahrheit einer Situation)다.


때문에 전체를 보려는 노력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러나 전체를 보는 것은 어렵다. 전체를 볼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지지하는 특정 이념에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자기 성찰을 하면 자기가 집착하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나와 갈등하는 상대방 입장에서도 세상을 바라보면,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데올로기 간의 장벽이 지금보다 훨씬 낮아지면서 갈등도 약화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편협한 정치적 이성을 넘어서 올바른 국가이성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국가의 이성이 종합적 사고를 해야 얻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올바른 국가이성을 찾아야만 인간의 자기 파괴적 성향을 극복하고 미래의 파괴적 재앙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 다음 원고에서는 <민족주의와 국가이성>에 대해서 쓰려고 합니다. 4월 초에 게시할 예정인데, 사정에 따라서 5월 초에 게시할 수도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댓글


더 이상 게시물에 대한 댓글 기능이 지원되지 않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사이트 소유자에게 문의하세요.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