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제국주의
목차
문제 제기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만남
나. 아직 자유민주주의가 되지 못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19세기)
제국주의에 대한 두 자유주의 거장의 상반된 입장
가. 존 스튜어트 밀: ‘선의’의 제국주의자
나. 허버트 스펜서: 제국주의자로 오해받은 제국주의 비판자
4. 태생적으로 반(反)민주적인 보수주의
가. 태생적으로 반(反)민주적인 보수주의자
나. 민주주의와 타협하며 ‘엘리트 민주주의’를 택한 보수주의자
5. 민주주의 vs 제국주의
가. 제국주의의 개념과 본질
나. 제국주의 탄생의 시대적 배경
다. 민주주의를 억압한 시대정신, 제국주의
라. 제국주의를 둘러싸고 분열한 자유주의
6. 지금 민주주의와 제국주의를 다시 생각하며
가. 제국에 대한 향수와 AI 혁명
나. 이 시대 우리의 과제
1. 문제 제기
많은 사람들이 ‘자유주의 = 자유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민주주의 = 자유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즉 민주주의에는 자유민주주의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역사가 자유민주주의 역사보다 오래다. 자유민주주의가 개념화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년대부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戰間期)에 민주주의는 나약한 정치제도라고 말한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으로 시련을 겪었다. 그리고 파시즘 체제가 등장하면서 무너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자유민주주의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역사다.
그런데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를 제외하고 흔히 ‘민주주의 = 자유민주주의’로 동일시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역사가 최소 200년 이상은 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독일에서 사용된 ‘사회민주주의’ 개념이 더 오랜 역사와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독일에서 단순한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 ‘사회적ㆍ경제적 평등을 실현하는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으로 사회민주주의가 사용된 것은 1870년대부터였다.
정당 명칭으로 사회민주주의를 공식 채택한 것은 1890년에 출범한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최초였으며, 19세기 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1850~1932)에 의해 수정 사회주의 이념으로 정립되기에 이른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세계 역사를 균형 있게 배우지 못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해 온 이데올로기적 편향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 자유 없는 평등은 죽은 사회를 만들고, 평등을 추구하지 않는 자유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제국주의는 우월한 인종과 국가가 열등한 인종과 국가를 지배하는 것을 ‘문명화’의 사명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약소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억압하며 착취했다. 평등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무력과 폭력으로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지배를 추구하는 제국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1830년과 1848년의 혁명으로 민주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한 19세기의 말기에 제국주의가 시대를 휩쓸었다. 특히 의회제도와 선거권 확대로 가장 민주적이었다고 평가되는 영국과 프랑스가 제국주의를 선도했다. 비(非)민주국가 독일은 제국주의의 후발주자였다. 이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실제 역사는 이렇게 전개되었다. 어떻게 이렇듯 모순되어 보이는 일이 발생했을까? 이런 현상은 과거에만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도 역사는 모순 속에서 전개된다.
유럽에서 자국 영토를 넘어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제국주의 시대라 하면 아프리카를 유럽의 열강들이 쪼개어 나누던 1880년부터 1914년(제1차 세계대전 시작)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1921년에는 전 세계의 절반이 식민지였다. 그리고 세계 인구 전체의 2/5가 식민지인으로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880년 이전에도 식민지 정책이 있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 들어서 식민지 정책은 제국들의 경쟁 속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제국주의 시대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본 원고에서는 식민주의와 다른 제국주의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19세기 말은 자유경쟁 자본주의에서 독점 자본주의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였다. 이때 많은 하층 중간계급 시민들이 급격한 변화 속에서 불안에 떨었다. 그리고 보수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인 제국주의가 이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면서 광기의 제국주의가 모든 것을 압도했다. 지금은 AI 혁명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다. 자본주의의 변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AI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거론될 정도라서 더욱 그렇다.

향후 AI 혁명으로 19세기 말~20세기 초보다 훨씬 더 큰 변화가 닥쳐올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역사는 21세기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의 문제는 본 원고의 결론에서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국가이성 시리즈」의 후반부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2.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만남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어 demokratia로부터 파생된 말로 demos(인민)와 kratos(지배)의 합성어다. 인민이 지배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개인이나 몇몇 소수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지배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독재정치를 배격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링컨이 1863년 게티즈버그에서 한 연설 속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는 말은 민주주의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
한편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이념이다. 근대에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경제적 측면에서 개인의 재산권을 보호할 필요성이 증대했다. 그러자 개인의 자유 및 기본권 보호를 추구하는 자연권과 이에 기초한 자유주의 이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자유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필자의 『국가이성 시리즈』 중 다른 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참조). 그리고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형성된 자본가(부르주아)들은 봉건적 특권과 예속 및 신분적 제약을 극복하고, 경제적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서 정치적 평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위해서 자본가들은 하층 계급(노동자와 농민 등) 다수의 지지를 유도하며 프랑스 대혁명(1789년)을 추진했다. 이때부터 민주주의는 절대주의와 봉건적 지배 질서에 대항하는 반대 개념과 투쟁 개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절대군주제 대신에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 국가 혹은 법치국가가 탄생한 것도 이러한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였다. 아직 민주주의가 보편적인 단어로 쓰이지는 못했지만, 이 같은 혁명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만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정치혁명이 1776년에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하는 전쟁 속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프랑스 대혁명보다 빨랐다. 미국은 독립 쟁취 후 헌법을 통해서 개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보장하는 동시에,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는 법치국가 시스템을 발달시켰다. 그러나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와 달리 근대에 형성된 대규모 영토국가(territorial state)에서는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없었다. 이에 선거를 통해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간접 민주주의 속에서 권력의 독재를 막기 위한 삼권분립 시스템을 제도적으로 도입했다.

이렇게 하여 18세기 미국 헌법을 통해서 인민주권(Popular Sovereignty)의 원리에 입각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만남이 최초로 시작되었다. 자유주의 국가의 기초가 되는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가 필수적이라는 원칙과 함께 역(逆)으로 민주주의적 제도 및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하나는 원칙이 만난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만남과 달리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학술적 만남은 19세기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밀 스스로 자신을 자유민주주의자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저서인 『자유론』(On Liberty, 1859)과 『대의정부론』(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 1861)은 19세기에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두 축, 즉 자유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결합하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렇게 상호 의존적인 자유주의적 이상과 민주주의적 절차가 현실 정치에서 불가분의 관계로 되면서 자유민주주의로 발전하기까지는 좌절과 진통 그리고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 아직 자유민주주의가 되지 못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19세기)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정치가 혹은 정치 집단이 자신을 민주주의자로 칭한다. 심지어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인 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을 가질 정도다. 그러나 민주주의 개념이 처음 사용된 고대 그리스 시기부터 19세기 초까지 민주주의는 긍정적인 정치 이념이 아닌 비방의 단어로 사용되었다. 지배계급과 사상가들에게 ‘인민’은 교양 없는 천민이자 무지한 대중으로 취급되었고, 민주주의는 천민이 지배하는 위험스러운 정치 체제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의회제도와 선거권 확대 등을 통해서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그러나 기득권과 구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보수주의자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 대혁명 등을 주도했던 자유주의자도 민주주의를 경계했다. 인민이 지배하는 정부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은 것이다. 그리하여 다수의 자유주의자는 19세기 동안 민주주의를 마음속으로 거부했다. 이것은 동시대에 존 스튜어트 밀이 남성은 물론 여성의 참정권 확대를 주장한 모습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사회구조가 변하면서 산업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공교육과 선거권이 확대되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자유주의자는 귀족을 비롯한 보수주의자와 경쟁하기 위해서 산업노동자와 농민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산업노동자와 농민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원하지 않았다. 인민의 참정권 확대가 자유주의 국가의 자유를 침식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에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19세기에 제한적인 참정권을 지지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없었다. 더욱이 19세기 말 제국주의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둘러싸고 자유주의자들이 분열하면서 자유주의가 몰락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없었다.
19세기에 선거권이 확대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수용하며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아르투어 로젠베르크(Arthur Rosenberg, 1889~1943)가 자신의 저서(Democracy and Socialism 1965)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그는 영국에서 1866년 이후 자유민주주의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이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선거권 확대만으로 자유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에 들어서 제1차 세계대전 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개념과 이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대로 꽃 피우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다. 특히 파시즘 독재와 구소련의 사회주의 독재를 경험한 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 없다는 생각 속에서 그렇게 되었다.
3. 제국주의에 대한 두 자유주의 거장의 상반된 입장
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선의’의 제국주의자
밀은 자유주의자였고,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밀은 자신의 저서 『자유론』(On Liberty, 1859)에서 자유주의 이론은 문명화된 유럽 사회에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즉 자신의 자유 이론이 후진적인 비(非)문명사회에서는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성년자에게 그러하듯이, 미개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자유 이론을 적용할 수 없다고 본 밀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개인들(barbarians)을 개명시킬 목적에서 그 목적을 실제 달성하는 데 적합한 수단을 쓴다면, 이런 사회에서는 독재(despotism)가 정당한 통치 기술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검토하고 있는 자유의 원리는 인류가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을 통해 진보를 이룩할 수 있는 시대에나 성립되지, 그런 때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자유론』, On Liberty, 서병훈 역, p. 37)
존 스튜어트 밀은 이상적인 그리고 선의의 제국주의를 주장했다. 제국의 이익이 아니라, 오직 식민지의 진보를 촉진하는 목적에서 제국주의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다. 문제는 식민지를 제국의 경쟁자로 만드는 이런 제국주의가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이냐 하는 것이다. 반면에 토크빌은 선의의 제국주의란 이중성과 위선으로 포장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영국정치의 이중성과 위선. 영국 사람들이 인도에서 한 일을 보면 특별한 것이 없다. 다른 유럽 국가가 지배를 하더라도 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끊임없이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그들이 짓밟고 있는 현지인들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식민 지배를 한다고 미화한다는 점이다.“(서병훈, 존 스튜어트 밀의 위선?: ‘선의의 제국주의’," 『철학연구』 제98집, p. 153)
밀은 1848년에 『정치경제학 원론』(The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1848)과 1850년에 프레이저스 매거진(Fraser’s Magazine)에 기고한 글에서 인종 차별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했다. 동시에 미국 남부의 노예제도를 비판하고, 노예제 폐지를 지지했다. 밀은 인종차별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비(非)문명사회의 사람들이 문명국가의 통치와 계몽을 통해서 문명인으로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제국주의자로 오해받은 제국주의 비판자
스펜서 사상에 대한 통설과 오해
스펜서만큼 오해받은 학자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를 주장해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든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펜서 자신은 생전에 ‘사회적 다윈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 진화(Social Evolution)’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스펜서가 제국주의를 옹호했다는 통설 역시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스펜서는 제국주의를 비판한 사상가였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일으킨 보어전쟁(Boer Wars)에도 반대했다.

스펜서가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스펜서 사후에 일각에서 이 개념으로 스펜서를 제국주의자들과 함께 묶어서 「사회적 다윈주의자」 및 인종 차별자로 비난한 경우가 많다. 널리 알려진 상식에 반(反)해서 스펜서를 소개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제국주의 이데올로그로 소개되고 있는 스펜서를 본 원고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간략하게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스펜서가 주장한 ‘사회 진화론’은 흔히 ‘인종(차별)주의’와 동일시된다. 그러나 스펜서는 ‘사회 진화론’에서 ‘자연의 법칙’이 역사의 진화 단계, 즉 ‘군사형 사회(The Militant Type of Society)’에서 ‘산업형 사회(The Industrial Type of Society)’로의 진화에 따라 다른 모습과 메커니즘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역사 발전의 초기 단계인 ‘군사형 사회’에서는 야만인의 도태가 인종주의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 논리가 ‘산업형 사회’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스펜서에 따르면 ‘산업형 사회’에서는 폭력을 통한 정복이 부당하며 오직 시장의 법칙과 자유경쟁 속에서 ‘적자생존’이 결정된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인종주의에 따른 폭력적 지배가 아니라, 문명인과 비문명인의 자유로운 무역과 교류 속에서 비폭력적 도태와 적자생존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사회 진화론’과 인종주의가 역사 발전의 단계에 따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전자와 후자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스펜서의 이론에서 강자에 의한 약자의 강제적 도태는 역사 발전의 초기 단계, 예컨대 ‘군사형 사회’에 해당하는 것이다.
스펜서는 약자에 대한 동정은 반대했지만, 동시대(19세기 후반)의 분위기에 맞서서 군사력으로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제국주의를 철저하게 비판했다. 스펜서에게 제국주의는 ‘산업형 사회’에서 과거의 야만적인 ‘군사형 사회’로 퇴보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Principles of Sociology, 1969)
그러나 스펜서가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거부했어도, 제국주의자들은 스펜서의 ‘사회 진화’ 이론과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프레임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사용했다. 자신들의 제국주의가 ‘자연의 법칙’에 따른 것이라고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스펜서가 오해받은 부분이 있다. 하지만 스펜서는 1882년 2월 22일 런던에서 결성된 ‘반(反)침략 동맹(Anti-Agression League)’에 창설 멤버로 참여해서 영국이 식민지에서 약탈 정책을 추진하는 것에 반대했을 정도로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스펜서의 이중적 입장

스펜서는 ‘군사형 사회’에서 ‘산업형 사회’로 진화할수록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민주주의가 당연히 도입되어야 하는 정치제도라고 보았다. 그러나 참정권이 확대될수록 대중의 표를 얻기 위해서 정치인들이 각종 복지 법안과 노동 규제 및 공교육 확대 등으로 국가의 개입을 증가시킬 가능성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스펜서가 국가의 개입 최소화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가 전제정치에 맞서서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장치라는 점에서는 지지했지만, 국가 개입의 확대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비판적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스펜서의 이중적 입장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도 잘 나타난다.
“… 과거의 참된 자유주의가 군주의 무제한적 권력이라는 전제에 이의를 제기했듯이, 오늘날의 참된 자유주의는 의회의 무제한적 권력이라는 전제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The Man Versus the State, Liberty Fund, 1982, p. 26)
4. 태생적으로 반(反)민주적인 보수주의
가. 태생적으로 반(反)민주적인 보수주의자
보수주의는 프랑스 대혁명 직후 귀족과 성직자 등 구집권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기존 질서의 변화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그런데 19세기에 민주주의는 기존 질서를 근본부터 흔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보수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면서, 민주주의 바람이 불자 이러한 흐름에 제동을 걸고 구질서를 옹호했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쳐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에 보수주의자는 민주주의를 나약하고, 분열적이며 국가를 파괴하는 반(反)민족적인 정치제도라고 비난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방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이것이 대세가 되자 보수주의자들은 현대 사회의 발전상에 적응하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있어도, ‘보수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사용되지 않는다. 보수주의가 태생적으로 반민주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서 잠시 영국에서 토리 민주주의(Tory democracy)라는 말이 등장하기는 했다. 보수 토리당(Tory Party)의 지도자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1868~1874)가 자유주의 정당인 휘그당(Whig Party)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노동자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1867년에 선거법 개혁을 시도하면서다.
디즈레일리는 이 선거법 개혁을 통해서 도시의 남성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두 번째 재임 기간(1874~1880년)에는 노동조합을 합법화하고 파업권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영국에서 나타난 독특한 형태의 선거 전략을 ‘보수민주주의’라고 부르기는 조심스럽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보통선거권을 이용해서 농민과 노동자의 지지를 얻으며 군주제를 강화했는데, 이를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19세기에 보통선거권을 통한 민주주의는 인민대중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읽고 쓸 줄 모르며 정치적인 개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들이 갑자기 선거권을 보유한다고 해서 사회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권력자가 원하는 대로 선거에 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1848년 이후 보통선거권은 보수주의자의 예상과 달리 그들의 정치에 큰 위협으로 비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인민 대중의 참정권 제한을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848년에 도입된 남성의 보통선거권을 이용해서 자신의 지배 체제가 인민의 동의를 얻은 것으로 포장하며 군주제를 강화했다. 비스마르크도 1867년에 북독일동맹의 제국의회에 그리고 1871년에 새로운 통일 독일제국에 보통선거권을 도입했을 정도다. 독일 인민은 비스마르크가 물러나기 전까지 그가 원하는 다수 의석을 제공했다.
나. 민주주의와 타협하며 ‘엘리트 민주주의’를 택한 보수주의자

보수주의자들은 시대가 바뀐 현대에도 여전히 대중을 어리석다고 보거나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엘리트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반(反)민주주의자로 시작한 보수주의자는 지난 19세기와 20세기 전반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와 타협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원칙을 무시할 수 없게 된 현실 속에서 형식과 절차 측면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엘리트가 다수를 지배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어리석은 대중들이 현명한 보수주의자를 자신의 지도자로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방세계에서는 민주주의가 구소련의 전체주의에 대립하는 정치 체제로 대세를 이루었다. 그런 상황에서 보수주의자는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민주적 절차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공동의 적인 사회주의자에 대응하기 위해서 자유주의자와 동맹을 맺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보수주의자들은 극우에 맞서 자신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하기도 했다. ‘보수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일반화되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사상적 뿌리는 다르다. 그래서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 혹은 보수주의적 자유주의자가 혼재하는 것 같지만,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5. 민주주의 vs 제국주의
가. 제국주의의 개념과 본질
제국주의란 유럽(아시아에서는 일본 포함)의 강대국들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피정복민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치적 지배를 강제적으로 확장한 시대적 경향과 이념을 말한다. 제국주의를 주도했던 유럽의 정치인들은 약소국이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한 운명인 것처럼 말했다. 백인종이 선천적으로 유색 인종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유색 인종을 지배하는 것이 백인종의 임무이며 의무라고 말했다.
사람의 가치가 다르다고 보지 않고서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선언과 모순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의 인권과 시민권이 - 자연법에 기초하고 있으며 - 신분과 재산 및 교육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게 존재한다는 이념, 즉 자유주의 이념과도 본질적으로 모순된다.
이러한 제국주의 개념은 최초에 벤저민 디즈레일리와 조지프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 1836~1914) 등 보수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노동자 대중의 생활 수준이 제국주의 정책의 성공 여부에 달렸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주의자의 세계시민주의와 국제주의에 반대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실제로 영국에서 노동계급의 상층부는 제국주의의 수혜자가 되었고, 이를 통해서 계급 간의 타협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식민지와의 교역이 식민지 모국의 경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국가마다 달랐다. 그리고 정상 자유무역 관점에서 식민지의 경제적 가치는 작았다. 세계 최대 규모의 제국으로 많은 식민지를 보유했던 영국에서는 이 비중이 컸지만,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스페인 등에서는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적었다. 그런데 식민지와의 무역이 국가 경제의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은 국가에서도 제국주의 정책이 경제적 혜택을 가져오는 것처럼 선전했다. 제국주의를 추진하는 데 필요했던 막대한 군사비 및 전쟁 비용과 비교할 때, 식민지와의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이 상대적으로 적었음에도 그랬다.

제국주의를 관철하는 주요 수단은 군사력과 폭력이었다. 폭력은 일상에서 직접적으로 행사될 수도 있었고, 협박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피정복자들 입장에서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폭력이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폭력을 야만적인 식민지인을 문명화된 인간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식민지인의 강제노동도 문명화 작업과 노동 학습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되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폭력으로 정복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고, 불법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비유럽국가들을 미개한 국가로 인식했기 때문에 주권을 침탈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당시 유럽 강대국들의 인식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식민지를 갖는 것이 강대국 혹은 제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자국민에게 제국의 국민이라는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며 결집을 시도했다. 이렇게 하면서 프랑스와 영국, 벨기에, 독일, 포르투갈 그리고 이탈리아 등 식민 열강은 1881년부터 1898년까지 에티오피아(Ethiopia)와 라이베리아(Liberia)를 제외한 아프리카 전체를 나누어 가졌다. 당시의 국제법은 민주주의 원칙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무역과 달리 식민지에서 식량을 수탈하고, 기타 자원과 원료를 착취했던 것은 제국주의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다. 식민지인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고, 강제 징집으로 강대국 간의 전쟁에 투입한 것도 제국주의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전쟁 물자를 생산하거나, 전선에서 도우미 역할을 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장과 광산 등지에서 노동하기 위해서 식민지로부터 약 50만 명 이상이 영국(약 30만 명)과 프랑스(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로부터 약 20만 명)로 전출되었다.

영국은 1914~1915년에 캐나다에서 50만 명 그리고 호주에서 30만 명을 군인으로 차출하기 전에 가장 먼저 인도인을 징집해서 전쟁에 투입했다.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인도차이나(Indochina) 및 마다가스카르(Madagaskar)에서 약 50만 명을 군인으로 징집해서 유럽 전선에 투입했다.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의 이 같은 행동을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난했을 정도였다.
나. 제국주의 탄생의 시대적 배경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변화: 자유경쟁 자본주의에서 독점 자본주의로
유럽에서는 1870년대의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19세기 말에 이르러 자본주의가 자유방임적 경쟁 자본주의에서 독점 자본주의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산업화에 따른 양극화와 빈곤 문제가 부각되면서 자유주의 패러다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자유주의 내부에서 ‘복지 자유주의’가 태동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한편, 비스마르크 같은 보수주의자는 사회보장제도를 추진하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약화를 시도했다.
당시에 대공황과 자본주의의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몰락의 위험을 느꼈던 소상공인과 쁘띠부르주아 등 중산층과 하층 중간계급은 커지는 불안과 불만 속에서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애국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동시에 자유주의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자유무역이 붕괴하면서 자유주의가 그들의 신분과 위상을 더 이상 보장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내적으로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노동계급을 적으로 돌렸다. 또한 국가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유태인 등 외국인 경쟁자와 타민족을 적으로 돌리는 과잉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마치 노동자들이 계급운동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처럼, 하층 중간계급은 새로운 극우 민족주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지식인과 청년 학생들도 자유와 진보라는 구호에 등을 돌리고 민족의 위대함과 국가의 권위에 열광하게 되었다. 동시에 보수 정치인들은 제국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을 비애국적인 반역자로 몰았다. 비스마르크는 국내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조국 없는 놈(Vaterlandslose Geselle)’라고 불렀다. 그리고 독일에서 보수주의자들은 ‘선량한 독일 민족’이 적들의 동맹으로 포위되어 있다는 관념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소(小)자본가가 몰락하는 대신에 대기업이 국가 경제를 좌우하는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대(大)자본가는 국내적으로는 여전히 국가가 기업 활동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국가가 소극적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산업 노동자들의 저항을 억압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 식민지 개척 및 제국주의를 통해서 대기업의 활동을 지원해 주는 것을 원했다.
우파 애국주의의 탄생
보수 정치인 입장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인해서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동시에 국가에 충성하는 방식도 함께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에 식민지 정복을 통해서 제국의 영광을 소환하는 방법으로 전통적 충성심의 부활을 노렸다. 이것은 지배층 입장에서 제국주의와 애국주의를 결합한 새로운 국가 이데올로기로 민주주의의 위험을 억제하는 수단이었다. 민주주의를 길들이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러한 우파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는 대중들을 국가에 묶어주는 강력한 접착제로 기능하면서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자는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민주주의가 강화되는 시대에 종교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중의 충성과 복종을 유도하기 어려워질수록 그랬다. 그리하여 과거에 자유주의적 전통과 가까웠던 민족주의, 즉 좌파적 민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새로운 정치적 종교인 우파적 애국주의로 변하고, 반(反)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 19세기에 민주주의가 확대되면서 노동운동이 발달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우파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의 토양 속에서 제국주의도 함께 발달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자유주의와 제국주의가 원래 대립적인 관계에 있지는 않았다. 자유주의자는 “민족주의에도 전쟁에도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파 보수주의의 선동적 이데올로기에 밀리면서 제국주의가 광범한 대중을 포섭하게 되었고, 자유주의자들은 제국주의를 둘러싸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보수주의자로 변신한 자유주의 정치가들도 많았다. 이렇게 되면서 제국주의 시대에 자유주의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우파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는 훗날 극단적인 파시즘으로 변형되는데, 특히 반유태주의라는 인종주의와 결합하면서 그렇게 되었다.
다. 민주주의를 억압한 시대정신, 제국주의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무역 질서를 흔드는 제국주의에 부정적이고 적대적이었다. 특히 기업가들은 안정된 정세 속에서의 경제 활동을 원했으며, 제국 간의 군사적 경쟁으로 갈등과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1873년부터 대공황으로 국가 경제가 어려워짐에 따라 미래에 대한 불안과 식민지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기업가들 사이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제국주의가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 향상을 통해서 국내의 사회 갈등을 해결하며 국가의 위상도 강화하는 만능 해결책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회적 풍조가 형성되었다. 특히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확대로 노동 계층의 저항이 증가하는 것에 위협을 느낀 상층 지배계급 혹은 전통적 엘리트들은 제국주의적 팽창을 통해서 국내적 갈등을 해외로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정부에 이런 정책을 요구했다.

한스 울리히 벨러(Hans Ulrich Wehler)는 이러한 형태의 현대 제국주의를 ‘사회 제국주의(social imperialism)라고 정의했다. 새롭게 과열되는 민족주의의 열기 속에서 ‘국가의 아들과 딸’이라는 이미지에서 정체성을 찾은 하층 중간계급들은 제국주의에 적극 동조했다. 이러면서 제국주의, 즉 새로운 형태의 우익 민족주의는 통제 불능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휩쓸고 지나갔다. 비이성의 광기가 시대정신이 된 것이다.
라. 제국주의를 둘러싸고 분열한 자유주의
19세기 말 산업의 카르텔화와 트러스트화가 대규모로 진행되면서 대자본가는 막강한 경제 권력을 갖고 관료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대자본가는 과거의 귀족처럼 국가가 불순한 세력을 강력하게 응징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을 원했다. 대내ㆍ외적으로 강력한 국가를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과거의 자유주의자가 최소 국가를 주장하며 국가의 개입에 반대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다. 대자본가가 보수주의자로 변신하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유주의자가 전통적인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로 변신한 자유주의자 두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특히 제국주의를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이렇게 분열된 자유주의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19세기 말 자유당 내부에서 로즈베리 경(Lord Rosebery)을 중심으로 한 우파가 보수당의 제국주의에 가까이 다가간 반면, 좌파는 비록 현실 정치에서 한계가 있었으나 원칙적으로 제국주의 팽창에 반대했던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톤(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의 전통을 옹호했다. 그러면서 당이 분열되었다.
독일에서는 자유주의를 주장했던 ‘민족자유당’이 1878년에 제국주의 정책을 둘러싸고 분열하면서 해체되었다. 그리고 1884년에 새로운 ‘민족자유당’으로 태어났는데, 이것은 명칭만 과거와 같았을 뿐, 자유주의적 개혁을 사실상 포기하고 대자본가의 입장을 반영하며 정부의 관세정책과 함대 정책(해군 전력 강화 정책) 및 식민정책 등을 지지했다.
6. 지금 민주주의와 제국주의를 다시 생각하며
가. 제국에 대한 향수와 AI 혁명
2014년에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서 영국인의 약 60퍼센트가 ‘영제국을 자랑스러워할 만하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영국인의 25퍼센트 이상이 영제국을 되찾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 여론조사도 있다.(The Guardian, 2020년 3월 11일) 이것은 영국인 다수가 영제국이 식민지에서 저지른 참상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제국을 막연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Caroline Elkins, Legacy of Violence, 2022)

영국 보수당의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 전 총리(재임 기간: 2019~2022) 역시 2016년 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 전ㆍ후부터 2020년 브렉시트 완료 시기까지 글로벌 브리튼(Global Britain), 즉 제국 2.0(Empire 2.0)을 정치적 슬로건으로 제시했다. 제국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서 내부의 정치적ㆍ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고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결집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또한 제국주의를 연상케 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
물론 21세기는 국제법 체계와 제국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국제 여론 등으로 인해서 19세기 말과 같은 고전적 제국주의를 관철하기 어렵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재임 기간 2001~2009) 전 미국 대통령이 ’대량살상무기(WMD) 제거‘와 ’중동의 민주화‘를 명분으로 2003년에 이라크를 침공했다가 패권적 위상에 결정적 타격을 입고 철수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19세기 말의 제국 같으면 점령한 국가에서 석유를 약탈했겠지만, 미국은 그렇게 할 수 없었고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군사비만 약 2조 달러가 소요된 막대한 전쟁 비용을 국채 발행으로 지불하고, 그에 따른 누적 이자로 미국의 재정 적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이 그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역시 유사한 결과를 초래했다.
과거처럼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할 여건은 안 되지만, 그럼에도 21세기에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가 다시 소환되었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전환기일수록 극단적인 사고에 빠질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지배구조와 축적 양식 및 정치ㆍ경제ㆍ사회적 관계를 고려한 패러다임에서 역사적으로 두 번의 전환기를 거쳤다. 그리고 현재 세 번째 전환기를 거치며 변화하고 있다. 1차 변화는 18세기 중ㆍ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18세기 초 남성의 하루 노동시간은 16시간 정도였다. 빈곤층의 여성과 어린이들도 생존하기 위해서 비인간적 조건에서 노동해야만 했다. 그 반작용으로 사회주의가 탄생했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현상도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2차 변화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경쟁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로 변화하면서 나타났다. 당시 몰락한 중산층의 공포와 불만을 우파 정치인들이 이용하면서 제국주의가 강대국들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되었고, 강대국들의 경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주요 발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3차 변화는 현재 디지털 자본주의와 AI 혁명이 결합하면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 변화의 규모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기술 중심으로 산업혁명을 구분할 때는 20세기 후반 정보화를 제3차 산업혁명 그리고 현재 AI를 통한 변화를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의 구분은 기술 중심의 구분과 근본적으로 다른 정치ㆍ경제학적 구분이다. 그리고 필자는 기술적 구분의 제3차 산업혁명과 제4차 산업혁명을 포함시켜 AI 혁명을 통한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3차 변화로 설명하고 있다.
아직 AI 혁명이 초래하는 제3차 자본주의 패러다임의 본질을 완벽히 규정하기에는 필자의 연구가 미진하다. 그러나 제1차 변화를 '자유경쟁 자본주의', 제2차 변화를 '독점 자본주의'로 규정한다면, 필자는 제3차 변화를 일단 가칭 '자기파괴적 자본주의'로 명명하고자 한다. 향후 이 문제에 관한 사상사적ㆍ정치경제학적 탐구를 깊이 파고들며, 이어지는 『국가이성 시리즈』 후속작을 통해 '자기파괴적 자본주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수정ㆍ보완해 나갈 것이다.
과거 1차 변화의 시기에는 기계화를 통해서 인간의 육체노동이 대체되었다. 그런데 AI 혁명은 인간의 지적ㆍ정신적 노동을 대체하고, 나아가서 로보틱스와 결합하여 육체노동을 대체하는 영역으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과거와 차원이 다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1차 변화와 2차 변화의 시기에는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중산층이 다른 일자리로 이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러나 현재 제3차의 변화 시기에는 단순 노무직뿐만 아니라, 숙련된 전문직도 일자리를 잃고 다른 일자리를 쉽게 찾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고용의 안전성이 상당한 정도로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량 실업의 희생자가 되는 이들 계층의 몰락과 불안 및 공포 그리고 인간 생존에 대한 근본적인 위기의식은 극단적 배타주의와 적개심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강력한 독재자 혹은 ’영웅‘을 정치 무대에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다. 알고리즘을 통한 대중 통제와 디지털 감시가 일상화되면서 법치국가의 기반이 흔들리고 민주주의의 위기가 증폭되는 상황에서 더욱 그렇다.
1차 변화의 시기에는 노동자들이 절대적 빈곤에 시달렸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회주의적 이상과 정치적 연대의 희망으로 버텼다. 2차 변화의 시기에는 제국주의에 이어진 파시즘 등 전체주의가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소재로 활용되면서 전쟁(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인간의 자기 파괴 현상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후 ’황금기‘의 번영과 몇 차례의 구조적 위기를 교차하면서 겪었으나, 특유의 체제 적응력을 바탕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발전해 왔다. 대신에 구소련 등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현재 3차 변화의 시기에 노동자는 파편화되어 과거처럼 연대하거나 저항하기조차 어려운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정작 보호받아야 할 비정규직과 하청 노동자들이 외면받는 가운데 노동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만 골몰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경쟁의 압박에 누구보다 시달리고 있다. 내일 인류의 멸망이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오늘 당장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야말로 자본가들이 직면한 최대 비극이다. 국가도 국가 간의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현실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넘어서 AI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미래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꿈은 멀어지는 것 같고, 연대의 희망 역시 찾기 힘들다. 이 시대에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나. 이 시대 우리의 과제
한국은 경제 기적을 달성했고, 그 결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2025년 국가데이터처가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25」에 따르면 66세 이상 노인의 빈곤율이 39.7%다. OECD 평균(14.8%)의 약 세 배에 달한다. 그리고 극심한 상대적 박탈감과 고립감 심화, 관계 단절 및 경쟁 지상주의 압박 속에서 자살률은 세계 최고의 수준(OECD 평균의 2배 이상)이다. 한국의 정치는 완전히 실패했고, 사회는 깊은 병에 들었다.
한국 사회와 국가에는 지금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는 비민주적이고 편향된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한국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현상이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의 그림은 세계 민주주의 지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10점 만점에 9~10점 사이에 있는 최상위 민주주의 국가 6개에 노르웨이와 뉴질랜드, 스웨덴, 이이슬란드, 스위스 그리고 핀란드가 포함된다. 한국은 31위(7.75점)다. 민주주의 지수를 평가하는 핵심 기준은 ① 선거 과정과 다원주의, ② 시민적 자유, ③ 정부 기능, ④ 정치 참여 그리고 ⑤ 정치 문화다. 이 6개국 중에서 스웨덴과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아이슬란드는 ’노르딕 모델(Nordic Model)‘이라고 해서 자유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사회민주주의적 복지ㆍ평등 정책을 성공적으로 결합한 것으로 평가된다.
'노르딕 모델'의 정치 문화는 하나의 정치 이념이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적대적이지 않으면서 상생ㆍ보충하는 정치 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북유럽 국가들에도 좌ㆍ우 이념에 따른 정치 균열이 있지만, 정치적 양극화가 한국처럼 심하지 않다. 정당들이 대립과 소모적인 분쟁에 매몰되지 않고, 합의와 연정에 의한 타협을 통해서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 Varieties of Democracy)의 시계열 데이터(정치 양극화: Political Polarization Index, 2010~2025)에 따르면, 0~1점 내외는 정당 및 지지자 간 적대감이 적고 타협과 상생이 원활한 상태를 표시한다. 반면에 3~4점 대는 상대 진영을 협력 대상이 아닌 ‘적(Enemy)’으로 규정하며 극단적 적대감과 불신이 지배하는 위험 상태를 표시한다. 최상위 민주주의 6개국(노르웨이, 뉴질랜드, 스웨덴, 아이슬란드, 스위스, 핀란드)의 정치 양극화 지수는 0.5~1.5 범위의 낮은 수치를 유지하며 안정적 협의 구조를 보여준다. 반면에 한국은 2016년 이후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2024~2025년 3.5 수준에 육박, 6개국과 현저히 대비되는 극단적 진영 대립 상태에 처해 있다.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 식민지 통치를 거쳐 해방된 후 분단 체제에서 6ㆍ25전쟁까지 치르며 우리의 사고는 균형을 잡으며 발전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사회민주주의라면 빨갱이 이데올로기라고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1932년부터 1991년까지의 기간 중 6년만 제외하고 44년 동안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지배했다. 노르웨이도 노동당이 스웨덴과 유사하게 오랜 기간 집권했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공존한다고 경제가 망하지도 않고, 나라가 망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들 국가에서 삶의 질은 한국보다 훨씬 높다.

한국 정치가 진영 간 적대적 양극화(V-Dem 지수 3.5 육박)에 몰두하는 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시장 논리와 경쟁 지상주의가 사람의 의식을 지배했다. 그러면서 OECD 국가 중 최고의 노인 빈곤율과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라는 비극적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많은 전직 대통령들은 재임 중 혹은 퇴임 후 감옥에 가는 일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국가는 우왕좌왕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앞으로도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에 병영국가이자 핵보유국인 북한의 불안정성과 공격성이 머지않은 장래에 남한에 미칠 부정적 영향까지 고려하면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막막한 심정이다.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뭔가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필자의 생각에 가장 절실한 것은 균형 잡힌 철학의 정립이다. 그리고 이런 철학을 정치에 투영시켜 정치가 제 모습을 찾게 하는 것이다. 즉 국가이성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올바른 국가이성과 민주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either this or that)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극단적인 좌ㆍ우 대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이것 아니면 저것」 대신에 「이것 그리고 저것」(this and that)이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Ulrich Beck, Die Erfindung des Politischen, 1993) 또한 「이것과 저것을 넘어서」(beyond this and that)라는 생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도 있다. 이것과 저것이라는 상대적인 개념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는 중학생 수준이다. 이와 비교할 때 노르웨이와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의 민주주의는 대학생 수준이다. 우선은 우리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히면서 민주주의 수준을 ‘노르딕 모델’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아울러 시장 만능주의와 AI 혁명이 초래할 수 있는 공멸의 위기를 방지하기 위해서 진보와 보수는 눈앞의 이익을 넘어선 정치적 선택과 인류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합의에 나서야 한다. 거대한 문명사적 전환기에 철학과 정치가 본령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진보와 보수 모두의 동반 몰락뿐일 것이다.
※ 다음 글의 제목은 “전쟁(제1ㆍ2차 세계대전)과 인간의 자기 파괴 그리고 국제주의”(잠정)가 될 것입니다. 지금 계획으로는 약 4개월 후쯤 홈페이지에 게시할 예정입니다. 사정에 따라 다소 늦어질 수 있음을 양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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